세 고양이와 내가 사는 곳은 넓진 않지만 볕이 잘 드는 집이다. ⓒ김영글 제공

오래전부터 탈서울을 꿈꿔왔다. 이유는 많다. 집값이 비싸서. 도시의 빠른 속도가 몸에 맞지 않아서. 자연 가까이 살고 싶어서. 함께 사는 세 고양이의 존재도 그 꿈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더 안전하고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사는 사람들은 다들 초기에 비슷한 생각을 한다. 길고양이를 구조해온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좁은 집안에 사는 걸 갇혀 있다고 느끼진 않을까?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게 단지 움직이는 새나 자동차를 구경하려는 걸까?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흔히 개는 서열 동물이고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고 한다. 개는 서열에 따른 복종 체계 속에서 무리생활을 하기에 반려인의 존재에 애착을 느끼고, 고양이는 자신의 영역을 한번 설정하고 나면 그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에 반려인보다 공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구분법은 소용없을지 모른다. 재개발로 헐고 부순 폐허의 자리에 남겨진 길고양이에게, 영역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인간의 문명은 동물의 생태계를 무너뜨려버린 지 오래다. 중요한 건 우리가 내린 선택에 어떻게 책임지며 살아갈 것이냐 하는 질문이다.

의지할 존재라곤 나밖에 없는 바보들

골목길에 살던 요다, 모래, 녹두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나의 의사이지 확실히 그들의 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해본 적은 없다. 추위와 더위와 사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3년에 불과하니까. 다만 가끔은 미안하다. 안정적인 주거를 갈구하지만 정착이 요원하다는 점에서는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반려인이 잦은 이사로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고양이들도 그 고난을 함께 겪는다.

일 때문에 한동안 제주에서 살게 되었을 때도 나는 고양이들을 데려갔다. 내게도 그들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모험이었다. 비행기 화물칸에서 승무원의 손에 짐짝처럼 들려 나온 고양이들은 겁을 잔뜩 먹은 채 찍소리도 내지 않다가, 내 얼굴이 보이자마자 목청 높여 울기 시작했다. 무서운 세상에 의지할 존재라곤 나밖에 없는 바보들.

새집에 도착했다. 얘들아! 여기가 제주도야. 근사하지?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이들에게는 벽지가 바뀐 또 다른 실내일 뿐이라는 사실을. 서울의 삭막한 회색 풍경 대신 멋진 풀밭이 펼쳐진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나마 위안 삼아야 했다.

낯선 곳이지만 내가 곁에 있으니 겁쟁이들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요다는 이따금 집밖에 나가 바람을 쐬고 돌아오는 여유를 부릴 줄도 알게 됐다. 몇 번의 계절을 보낸 뒤, 배를 타고, 트럭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더 눌러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 동네에는 동물 병원이 없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곳은 넓진 않지만 볕이 잘 드는 집이다. 일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들이 보인다. 내가 좋은지 이 공간이 좋은지는 몰라도 그들이 그릉그릉 만족하는 소리를 내며 쉬고 있으면 내 마음도 평화로워진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도 더 나은 집을 찾아 헤맬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게 어디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집이니까.

기자명 김영글(미술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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