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 서울의 한 백화점 내 유니클로 매장에서 ‘명품 협업 제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 ⓒ독자 제공

10월15일 아침 일본 패션업체 유니클로(UNIQLO) 홈페이지는 마비되다시피 했다. 명품 아웃도어 브랜드인 화이트 마운티니어링과 협업한 제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 것.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300만원 값하는 패딩 점퍼를 10만원대에 판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식 홈페이지는 오전 중 품절 공고를 띄웠고, 낮부터는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거래가 활발했다. 10만원대 물건을 50만원에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유니클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은 업체다.

더 놀라운 현상은 한 달 뒤 일어났다. 인기 절정이던 이 제품은 현재(11월10일 기준) 유니클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회사가 물건을 추가로 들인 걸까? 패션 제품 마니아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달리 해석한다. 물량 대다수가 반품이라는 것이다. 반품이 많이 모여 재입고처럼 보이는 현상을 이들은 ‘취스탁(취소+restock)’이라고 부른다. 앞다퉈 사간 상품을 불과 며칠 뒤 우수수 환불하는 이 기현상은 리셀(resell) 때문에 벌어진다. 정가로 물건을 사서 웃돈을 받고 되파는 게 리셀이다. 물건 ‘시세’가 예상만큼 높지 않아 웃돈을 많이 매길 수 없으니 판매처에 반품하는 것이다.

유니클로뿐만 아니라 온라인 패션 분야 전반에서 심심찮게 불거지는 일이다. 운동화 업계 1위인 나이키가 특히 심하다. 나이키는 주기적으로 유명 디자이너 협업 제품이나 한정판 기념 운동화를 내놓는다. 백화점이나 마트 매장에서는 살 수 없는 제품이다. 정해진 날, 지정된 소수 점포나 온라인 홈페이지에서만 판매한다. 물건은 거의 발매하자마자 품절된다. 매번 온라인 홈페이지에 사람이 몰려 서버가 터지자 나이키는 추첨 방식을 도입했다. 발매된 제품들의 향방은 이후 둘로 나뉜다. 이번 ‘유니클로 사태’처럼, 일부 제품은 몇 주 뒤 슬그머니 물량이 생겨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생각보다 시세가 낮아 반품했다”는 글이 올라오는 제품들이다. 반면 재입고되지 않는 제품도 있다. 개중에 어떤 것은 중고시장에서 정가의 몇 배, 몇십 배에 팔린다.

시세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결정된다. 같은 유니클로, 같은 나이키인데 떨이로 팔리는 게 있고 줄 서서 사가는 게 있다. 한정판이라고 모두 잘 팔리지도 않고, 물량이 많아도 곧바로 다 팔리는 것도 있다. 제품 모양이 같아도 색깔과 발매 시기에 따라 시세는 천차만별이다. 나이키 조던 1 제품 중 노란색과 검은색을 쓴 ‘폴런(Pollen)’은 정가(19만9000원)에 살 수 있다(중고 시세는 3만~4만원 더 싸다). 갈색·검은색인 조던 1 ‘블랙 모카(Black Mocha)’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없고, 중고시장에서 60만~70만원대이다. 올해 나온 조던 1 제품 가운데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은 트래비스 스콧, 프라그먼트와 협업한 모델이다. 400만원 전후에 팔리고 있는 이 제품의 발매가는 23만9000원으로, 대부분의 나이키 신발처럼 중국 공장에서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이 현상을 ‘MZ 세대의 새로운 소비 행태’라고 본다. 젊은 층의 관심이 높은 운동화 등이 특히 활발하게 ‘리셀’ 거래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좋아하는 물건에 돈을 아끼지 않기에 물건값이 오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물건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늘어났다면 가격도 올라야 하는데, 정작 운동화 ‘정가’는 그리 인상되지 않는다. 근래 들어 훨씬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것은 리셀가(resell價)이다.

온라인상에서 운동화 전문가로 유명한 곽지원씨는 ‘정품 인증’ 거래 플랫폼에서 검수 작업을 한다. ⓒ시사IN 이명익

‘코비진스’라는 아이디로 20년 가까이 활동해온 곽지원씨는 온라인상에서 운동화 전문가로 이름이 높다. 그는 운동화 리셀 시장의 확장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10년, 20년 전과 비교해 운동화의 ‘정가’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 다만 중고시장에서 ‘프리미엄(웃돈)’ 붙는 제품이 많아졌다. 과거 나이키에서 내놓는 운동화 100족 중 한두 개에 프리미엄이 붙었다면 지금은 10족, 15족이 비싸게 거래된다.” 무엇 때문일까? 곽씨는 ‘시장참여자’들이 늘어났다고 설명한다. “예전에는 신발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만 알음알음으로 정보를 얻어 한정판 운동화를 샀다. 요즘엔 신발과 전혀 관련 없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정보가 떠돌더라. ‘옆집 사람이 운동화 판매에 당첨돼 20만원에 사서 100만원에 팔았다’는데 누군들 관심 안 가질 수 있을까?”

누구도 신지 않고 값만 오르는 운동화

시장참여자를 획기적으로 늘린 것은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이다. 이들은 ‘인기 있는 제품을 사두면 플랫폼을 통해 쉽게 팔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사람들이 중고품 매매에 주저하는 이유는 신뢰 때문이다. 상대방이 제대로 된 물건을 보내줄지 알 수 없다. 특히 패션 제품은 ‘가품(가짜)’ 문제가 있다. 시중에는 일반인이 도저히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가짜 제품이 많다.

최근 등장해 급성장하고 있는 거래 플랫폼은 단순 거래 중개를 넘어 ‘전문가’들이 정품 여부를 인증한다. 2015년 창업한 미국의 스탁엑스(StockX)가 대표 격이다. 판매자가 상품을 보내면 스탁엑스가 정품인지 판별한 뒤 구매자에게 배송하는 방식이다. 스탁엑스는 3년 만에 기업가치 1조원을 넘겨 ‘유니콘 기업’으로 분류됐다. 운동화뿐만 아니라 롤렉스 시계 등 명품 재화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현재 기업가치는 4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국내에도 크림(Kream), 프로그(Frog) 등 비슷한 방식을 도입한 업체가 여럿 있다. 아마추어 정가품 감별사였던 곽지원씨는 현재 프로그에서 검수 작업을 한다.

정품을 보증하는 ‘중간자’ 덕에 중고거래 시장이 안정을 얻자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이 이 판에 등장했다. 전문 리셀러이다. 이들은 정가로 물건을 사거나, 리셀로 구하기도 한다. 주된 목표는 시세 차익이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행위 자체가 목표인 사람이 늘고 있다. 운동화나 아웃도어, 시계 등 각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다수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다만 주식 투자가 그렇듯 이 분야 정보에 밝은 사람이 이익을 얻기에 유리하다. 운동화나 점퍼 신상품을 리뷰하는 유튜브 채널 가운데에는 이 ‘투자자’들을 겨냥해, 제품의 심미성이 아니라 시세 향방에 더 집중하는 곳도 있다. ‘옷이 예뻐서’, ‘운동화가 편해서’가 아니라 ‘비싸질 것 같아서’ 사는 사람들이 많기에, 제조사는 인기 있는 물건이라도 함부로 값을 올리지 못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운동화 애호가들은 종종, 리셀 시장이 지금만큼 활발하지 않았던 때를 회고하곤 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여론’은 대체로 “지금 상황이 훨씬 편하고 합리적”이라는 쪽으로 수렴한다. 어제 나온 신상품부터 수년 전 나온 희귀 제품까지 정품 여부를 판별해 매매를 중개하는 플랫폼 시스템 덕분이다.

하지만 편리하게 사고판 신발 가운데에는 누구도 신지 않은 채 ‘시가’만 오르는 이상한 물건이 적지 않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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