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과학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 부인의 초상화. ⓒWikipedia

우주의 중심이 태양임을 선언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로 ‘과학혁명’이 시작됐다. 서구 문명을 중세에서 근대로 이끌어낸 이 과학혁명은 1687년 지구의 운동을 설명하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로 완성된다.

뉴턴이 세상을 떠난 1727년, 영국에 와 있던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뉴턴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과학자의 죽음을 국가적으로 애도하는 영국의 분위기에 감명을 받는 한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뉴턴의 사상에서 프랑스를 개혁할 길을 찾았다. 장차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볼테르에게 뉴턴의 과학을 가르친 사람, 〈프린키피아〉에 풍부한 주석을 달아 번역하여 프랑스에 보급한 사람, 뉴턴과 라이프니츠 사이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에너지 보존 가설로 역학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있다. 아직 여성에게 과학자라는 이름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 근대과학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 부인이다.

에밀리는 1706년 12월17일 파리에서 6남매 중 유일한 딸로 태어났다. 루이 14세의 측근인 아버지 루이 니콜라 드 브르퇴유는 매주 집에 저명한 작가들과 과학자들을 초대하여 토론하던 지식인이었다. 니콜라는 딸에게 펜싱과 승마를 가르치고, 수학과 문학·과학 그리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손수 가르쳤다. 친구이자 프랑스 파리 과학아카데미(파리 아카데미) 회원인 퐁트넬을 초대해 에밀리에게 천문학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밀리의 어머니인 가브리엘은 딸을 걱정했다.

당시 귀부인들은 살롱에서 당대의 학자나 예술가와 교류했다. 하지만 살롱의 주인인 귀부인들은 학자나 예술가인 남성들의 후원자이자 찬사를 보내주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해도 여성은 파리 아카데미는 고사하고 남성들이 지적 토론을 위해 모이는 카페에조차 입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사교계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도박에서 승승장구했다.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돈이 부족하자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활용해 도박에서 높은 승률을 내기도 했고, 판돈이 부족해지자 자신이 도박에서 딸 돈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는 파생상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가브리엘은 말썽꾸러기 딸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에밀리는 1725년 플로랑 클로드 뒤 샤틀레 로몽 후작과 결혼했다.

유물론과 형이상학의 통합 시도

에밀리가 번역한 〈프린키피아〉. ⓒWikipedia

당시 귀족들의 결혼은 집안 간의 결합이었으며, 부부는 후계자를 낳고 나면 다른 사람을 만나 연인으로 삼곤 했다. 에밀리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에밀리는 딸과 두 아들을 낳아 ‘의무’를 다했고, 샤틀레 후작은 학문을 좋아하는 아내를 후원하는 너그러운 남편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에밀리는 파리 아카데미 회원인 모페르튀이와 베르누이, 클레로 등 프랑스 최고의 학자들을 스승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공부를 재개했다. 그리고 앞서 영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돌아온 볼테르와 연인이 된다.

당시에도 볼테르는 프랑스의 사회구조나 정치, 귀족들의 폭압에 대해 입바른 말을 계속하며 정부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에밀리는 볼테르를 보호하기 위해 로렌 지방의 저택으로 데려갔고 이곳에서 볼테르의 권유로 아이작 뉴턴의 연구를 접하게 된다.

볼테르는 뉴턴의 유물론이나 결정론, 기계론 같은 세계관에서 계몽주의의 희망을 찾고 이를 대중에게 설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볼테르가 당대 최신의 과학 이론이었던 뉴턴의 업적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뉴턴의 광학과 역학에 매료된 에밀리는 〈프린키피아〉를 공부해가며 볼테르를 도와 〈뉴턴 철학의 요소〉의 과학적인 설명 부분을 함께 저술해나갔다. 1738년 처음 발표될 때 볼테르의 영국 여행기와 함께 묶여서 출간되었던 이 책은 1740년 별도로 출판됐고, 다시 1745년에 뉴턴의 형이상학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볼테르는 이 책의 앞부분에 천상에서 비추는 지혜와 통찰의 빛이, 에밀리의 손에 들린 커다란 거울에 반사되어 책상 앞에 앉은 볼테르에게 쏟아지는 삽화를 집어넣어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에밀리는 단순히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볼테르의 뮤즈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파리 아카데미에서 불의 성질에 대한 논문을 모집할 때, 에밀리는 볼테르가 쓰려는 논문의 주제에 반박했다. 그리고 빛과 열은 동일한 물질이라는 생각으로 직접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에밀리가 쓴 〈열의 성질과 전파에 관하여〉는 비록 입상하진 못했지만 심사위원들의 추천을 받아 출판되었다. 여성의 과학 논문이 파리 아카데미에서 출판된 첫 사례였다.

이후 에밀리는 아이작 뉴턴에 대해 다룬 〈물리학 강의〉를 출간했다. 이 책은 에밀리가 열세 살 된 아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치기 위해 썼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뉴턴의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관과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을 통합하려고 시도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처음에는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볼로냐의 과학아카데미는 이 책을 쓴 공헌을 인정하여 에밀리를 협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에밀리는 힘과 운동량의 관계에 대해 실험한 뒤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든 항상 동일하고 이를 다른 형태로 변환할 수 있다는 에너지 보존 가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에밀리의 가설과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역학을 발전시켰다.

에밀리의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린키피아〉를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를 계속하던 중 그는 마흔두 살의 나이로 임신을 하고 말았다. 당시 의술로는 그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에밀리는 출산 전에 이 번역을 마쳐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리고 번역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749년 9월4일, 에밀리는 출산 합병증인 폐색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밀리가 세상을 떠난 뒤 출간된 〈프린키피아〉 프랑스어판은 대륙에서 과학혁명의 완성에 크게 기여했다.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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