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름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태일이〉는 홍준표 감독(왼쪽)의 장편 데뷔작이다.ⓒ시사IN 이명익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은 사람들이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빠르게 클릭했다. 기름진 머리칼과 충혈된 눈, 무채색 계열의 옷이 눈에 띄었다. 이따금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업실 고양이 만주와 넷째의 기척이었다. 10월26일 서울 성산동 ‘스튜디오 루머’의 풍경이다. 12월1일 개봉을 앞둔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홍준표 감독을 만났다.

〈태일이〉는 홍준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2017년, 전태일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듬해 본격적으로 합류해 지난 3년간 작업에 몰두했다. 영화 〈카트〉 등 노동에 대한 관심을 이어온 명필름이 〈마당을 나온 암탉〉 이후 제작하는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데다 전태일재단이 힘을 보태기로 해 화제를 모았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홍 감독은 좀 어렵다고 느꼈다. “평소 내가 쓰던 시나리오 문법과 좀 다르기도 했고 열사라는 상징적 느낌이 강했다. 다만 (전태일이 아니라) ‘태일이’로 표현하기에 충분한 시나리오구나,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22세 청년 전태일. 누구나 아는 실존 인물을 다룬다는 데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인물을 넘어 (노동운동사의) 상징적 인물이다. 아는 건 제한적이고 그 시절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니 충분히 연구하고 빠져들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았다.” 생전에 고인이 남긴 글을 참고했다. 일기·편지·메모를 들여다보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태도로 일했으며 어떻게 사람을 대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처음 영화가 공개된 2021 부산국제영화제의 관객 중엔 제목만 보고 영화 〈완득이〉를 연상했다가 놀랐다는 반응도 있었다. 어떤 세대에게 전태일은 완전히 낯선 이름이다.

열사의 모습만이 아니라 20대 초반 청년의 평범한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실제 얼굴과 비슷한 생김새로 묘사했다가 어디서나 볼 법한 이미지로 바뀐 배경이기도 하다. 성격을 표현하는 데 가장 고심했다. 말투나 성격에 대한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주인공 태일이 스스로 개성을 드러낸다기보다 주변 인물과의 대화나 관계 속에서 표현되길 바랐다. 실제 영화 안에서 태일이는 동료, 가족, 사장 등 마주하는 사람에 따라 유머러스했다가, 부끄러워했다가, 비장해진다.

영화는 전태일의 짧은 인생 중 평화시장에 재단 보조로 취직한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홍 감독의 자리 주변은 1960~70년대 서울 청계천과 동대문 인근 자료 사진으로 가득했다. 자료의 도움을 빌려 ‘여길 거닐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했다. 작품 속 주된 배경인 평화시장 내부는 지금도 그대로다. “가보니 화재 시 대피도라고 해서 건물 도면이 붙어 있었는데 옛날 자료에 나오는 평면도와 구조가 같았다. 태일이가 어떤 출입구로 들어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동선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 속 배경은 실감나고 사실적이어서 극의 몰입을 돕는다. 실내를 부유하는 먼지의 표현까지 치밀해 그 공간을 함께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홍준표 감독은 1985년생이다. 함께 작업하는 창작자들도 또래다. 여느 동년배처럼 평전, 영화 등을 통해 전태일을 접했다. 이번의 100여 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전 세대를 아우른다. “전태일의 의미가 세대마다 다르면서도 같다. 내게는 아버지뻘인데 그 세대의 태일이가 있고 내 세대, 다음 세대의 태일이도 있다. 열사에 대한 이야기지만 힘든 노동을 겪는 청년들의 이야기라 세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시점이든 비슷한 부분이 존재할 것이다. 전태일 정신이라는 것이 시대를 지나면서도 계속 이야기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감독의 말대로 전태일이 떠난 지 51년 지났지만 지금도 청년들은 직장에서, 작업 현장에서 죽는다.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가능성을 믿는다”

홍 감독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태일이가 동료 미싱사 영미를 업고 뛰는 장면이다. 장시간 먼지를 마시며 일하다 폐병으로 쓰러진 직후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그 장면을 기점으로 태일이가 변화를 겪는다. 일을 열심히 해서 재단사가 되는 꿈을 꾸는 것에 집중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지점이다.” 등장인물 중에서는 재단사 신씨에게 마음이 간다. 중간관리자로 동료들을 착취하는 데 가담했다가 바뀌어가는 인물이다. “그분의 비하인드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데 나중에는 태일에게 도움을 준다. 그 변화의 과정이 궁금하기도 하다.” 극 중 전태일, 이소선 여사, 아버지의 목소리는 각각 장동윤, 염혜란, 진선규 배우가 맡았다.

홍준표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지금껏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천성인 셈이다. 그는 “일반 관객들은 누가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태일에게 집중하는 영화가 되면 좋겠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 종사하거나 이제 막 시작하는 분들에겐 희망을 줄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다. 비슷한 세대의 스튜디오가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그게 극장에서 개봉하는 걸 보면 어떤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작업을 하며 예술가의 노동환경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태일 정신에 대해 체감한 순간도 있다. 지난 3년 동안 좌절한 경험을 물었더니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혼자 하는 작업이면 몰라도 같이 하는 아티스트가 대단한 분들이고 함께 머리를 맞대니 길이 생겼다. 전태일 정신 안에도 ‘우리’라는 상징적 단어가 담겨 있는데 거기에 큰 힘이 있는 것 같다.” 감독의 대답이 영화 대사와 겹쳤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입니다.’

〈태일이〉는 시민들이 제작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2019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개월간 1만명 넘는 시민이 1억원여 제작비를 모아 화제가 됐다. 개봉을 앞두고 후원자·투자자를 계속 모집하고 있다. 투자자(‘1970인 제작위원’) 전원은 엔딩크레디트에 실명이 기재된다. 1만원 이상의 후원자도 마찬가지다(자세한 내용은 ‘bit.ly/태일이2021’ 참조). 홍준표 감독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미 한 차례 수많은 후원자·투자자의 이름이 엔딩크레디트로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화제에서 큰 화면으로 보니 더 와닿았다. 개봉 직전까지도 최선을 다해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늦은 오후에 시작한 인터뷰를 끝내자 어느새 밖이 어둑했다. 오늘 밤은 ‘찐 밤샘’이 될 것 같다는 감독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 뒤에 붙은 태일이와 이소선 여사, 영미, 재단사 신씨 등 영화 속 캐릭터가 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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