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란 민음사 콘텐츠기획팀 팀장은 자타 공인 프로 소비꾼이다.

나는 자타 공인 프로 소비꾼이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별다른 노력 없이 보통의 기준을 넘어서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소비다. 궁금하거나 신기한 것, 재미있어 보이거나 예쁜 것은 사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 새로운 서비스는 이용해봐야 하고, 뭐든 지키고 모을 때보다 사서 쓰는 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더 크다. 그러나 다음 달 카드값 걱정 없이 소비할 수 있을 만큼 부자가 아니며 대인배도 되지 못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 소비 후에는 그만큼의 소비 합리화 회로를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때 유일한 위안이 내가 마케터라는 사실이다.

나의 ‘본캐’가 사고 싶은 건 못 참는 ‘흑우(호구)’ 소비자라는 점은 소비가 미덕인 마케터로서 일할 때 도움이 된다. 소비를 관찰하고 사람들에게 필요하거나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을 즐겁게 사도록 동기부여하며 죄책감을 덜어주는 일이 마케터의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니까 사야 하고, 저 책은 일에 도움이 될 책이라서 산다. 누군가 재미있다며 추천하는 책도 사고 표지가 예쁜 책도 산다. 어떤 책은 원래 관심 있던 분야의 신간이어서, 어떤 책은 재미있는 드라마의 원작이어서 사두고, 이 작품은 안 읽어본 작가의 것이라서, 이 작품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라서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이런 일차원적인 소비 동기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내 밥벌이가 시작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까지의 소비는 결국 조금 더 벌기 위해 미리 지불한 자기 투자비용이 아닐까(아니다).

나는 책 읽는 사람이 많아지려면 일단 읽지 않아도 사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이 사면 그중에 한 권은 읽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읽고 싶게 만들기 이전에 사고 싶게 만든다. 읽고 싶게 만들기가 책의 내용에 집중한다면, 사고 싶게 만들기는 내용뿐 아니라 책을 둘러싼 주변의 다양한 욕망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책을 사면서 책 읽을 가능성을 산다. 지식을 구매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사 모으기도 한다. 휴가지에서 들른 서점에서는 책 읽을 시간과 여유를 구입한다. 내가 직접 표현 못하는 내 감정을 구입하고 시간과 여유를 산다. 경험과 시행착오를 구매하기도 한다. 내가 책이라는 상품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이런 다양한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켜줄 상품이 이 세상에 책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변덕이 심한 내가 지난 11년간 쉬지 않고 꾸준하게 질리지 않고 한 것을 꼽아보라면 ‘일’이다(일뿐인 것은 유감스럽지만). 일은 대체로 내 적성에 맞았고, 적당히 즐거웠고, 가끔은 보람 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나보다 나은 이들이었고 팔아야 할 상품인 책 또한 위대하거나 적어도 훌륭했다. 이런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다.

그러나 뛰어난 성찰이란 고통 속에서 나오기 마련인 건지, 내게 일은 고통도 의무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일 자체에 대해 고심해볼 기회는 적었다. 시작도 거창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회사, 어떤 직무에 입사 원서를 넣어야 할지 모르겠던 시절 누군가 나에게 “너 책 좋아하니까 출판사 어때?”라고 했던 말을 붙들고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결국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기에 일이라는 영역에서 재미의 요소를 나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일하는 게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쩐지 꺼려진다. 일과의 적당한 거리 유지, 정시 퇴근 후 보장되는 개인 시간, 직장 동료와는 일할 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친해지기. 요즘은 이런 덕목들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일수록 똑똑하고 일하기 편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받는 만큼만 일하기’의 규칙을 잘 지키는, 손해 보지 않는 직장인이 되는 것이 요즘 회사 생활의 지혜다. 주인의식 운운하며 맡겨진 일에 더 영혼을 갈아 넣길 바라는 회사와 그로부터 소중한 영혼을 지키려는 직장인은 언제나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조아란 팀장이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 ‘민음사TV’에 올라온 영상. 출판사 마케터의 장바구니 털기, 직장인의 점심 도시락 먹방 등이 소재다.

지속가능한 밥벌이 위한 절전모드

하지만 하루 꼬박 여덟 시간 이상,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절반의 시간을 바쳐야 하는 일이 단지 벌이만을 위한 것이라면 허무하다. 호시탐탐 회사 동료·후배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더 이상 일 벌이지 말자 생각하다가도 뜻 맞는 동료와 함께하는 회의에 들어가면 겁도 없이 행사며 이벤트를 잔뜩 벌이고 마는 마음이 나에게는 있다. 입사해서 쭉 책만 들여다봤는데 이제 와서 유튜브 같은 걸 어떻게 하나 싶다가도 이게 요즘 트렌드이고, 할 사람 없으면 내가 해볼까 싶다. 시작하면 당연히 잘하고 싶지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은 상태 역시 찾아온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기보단 출근은 싫어도 일 잘하는 사람이고 싶은 오락가락한 상태가 무한 반복되는 상황이 일과 나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비로소 찾아오는 평화가 있다.

일은 어차피 즐겁기만 할 수 없고, 또 괴롭기만 하면 지속할 수 없으니 반쯤은 취해 있고 반쯤은 깨어 있는 이 환각과 각성상태를 잘 오가는 것이 직장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 아닐까 하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그때그때 눈치껏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열정맨과 월급 루팡 회사원 그 사이 어딘가를 빠르게 오가기. 그래서 일의 기쁨과 슬픔, 효율과 비효율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지속가능한 밥벌이를 위한 나만의 절전모드다.

조금 더 어렸을 때의 나는 시간이 지나 더 ‘어른’이 되면 일에 대해서든 삶에 대해서든 막연하게나마 나의 노선을 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갈팡질팡한다. 책은 상품이었다가 작품이기도 하고, 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이런 상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에도 일은 어쩔 수 없이 결과로 평가될 것이고, 나의 노력과 시간은 귀여운 월급으로 환산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나의 일을 스스로 정의 내릴 기회를 꾸준히 찾다 보면 조금 더 많은 순간들을 보람과 재미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다. 어디선가 행복은 자기합리화 능력에 달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업무 시간에 쇼핑하는 것도, 몰래 유튜브를 보는 것도 결국 다 일에, 책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진짜로.

기자명 조아란 (민음사 콘텐츠기획팀 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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