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북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서체와 이를 바탕으로 만든 책 표지.

그림을 그리는 거냐, 글을 쓰는 거냐. 아직도 이 일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곧잘 받는다. 책이라는 물성 뒤에 가려진 많은 종류의 노동 가운데 내가 담당한 것은 ‘책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상대의 옷차림을 통해 그의 취향이나 성격을 가늠해보듯, 책의 디자인도 그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도구다. 그렇기에 적어도 책의 내용을 오해하지 않을 만한 외양을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외양만으로 너무 쉽게 간파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이런 마음들은 상반된 성격의 것이라 나는 종종 출판인과 디자이너라는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한다.

책의 외양은 구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국내 독자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미적 기준이 높다. 독자들의 까다로운 취향과 더불어 한국의 북디자인이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 출간물의 리커버 디자인이나 서점별로 다른 표지를 입혀 내보내는 기획도 모두 독자의 수집욕을 자극한다. 책은 내용이 중요하지 인스타그램용 소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예뻐서 산 책이 내용까지 좋거나, 필요에 의해 산 책이 예쁘기까지 하면 더 가까이 두고 읽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책이 멋 내기에 좋은 소품까지 된다면 썩 훌륭한 일이 아닌가?

독자의 미감에 부응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보다 독창적인 디자인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작업자의 딜레마가 있다. 상업미술이자 협업의 결과이기도 한 북디자인은 오롯이 디자이너만의 작업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정해진 일정과 요청받은 조건이라는 한계 내에서만 자신의 디자인을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작업에 임하게 되면 디자이너도 여느 순수미술가 못지않은 태도로 작업을 해낸다. 물감을 뿌린 작품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처럼 즉흥적으로 색을 배합하거나,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처럼 상징적인 아이콘을 개발하기도 한다. 북디자인이 글의 전달 매체라는 목적을 넘어 그 자체도 하나의 작품으로서 향유 대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단순히 작업자의 욕심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도구이지만 때론 목적이 되고 싶어!’라는 마음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결과물을 놓고 관계자들의 논의가 오가는 과정에서 디자이너에게 결정권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도 작업자로서는 여전히 아쉽다. ‘디자인 컨펌’은 주로 편집부, 마케팅부, 저자와 저자의 주변인(‘섀도’라고도 부른다), 역자, 해외 에이전시 등을 거치는데, 이때 상반되는 의견들이 부딪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요.’ ‘본 적 없는 방식이라, 너무 낯설어요.’ 특히 낯설까 염려된다는 의견을 들으면 어떤 일화가 떠오른다. 입시 미술학원의 석고 소묘 시간에 자기만의 독특한 기법을 구사하는 학생들에게 강사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채점하는 교수의 눈을 놀래키면 안 돼!”

무난한 작품들 속에서 튀는 그림은 극명하게 선호도가 갈린다는 것. 입시 미술은 1등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커트라인에 드는 것이 목표인 점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노하우이다. 하지만 튀는 그림은 한 번이라도 더 주목받는다. 똑같은 주제를 그려낸 그림 수백 장 중에 시선도 받지 못하는 그림이 훨씬 많음을 생각하면, 적어도 눈을 놀래키는 그림은 보는 사람을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어디에 방향을 두고 작업해나가야 할까. 독자의 눈은 어디를 향할까. 눈이 놀라고 싶지 않은 독자도 내겐 똑같이 소중한데….

'책에 옷 입히는' 작업을 하는 정지현 북디자이너.

편집자가 반복하는 단어에 주목

디자이너라면 적어도 자기가 작업한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작업 과정에서 얻는 확신이며 이 확신은 거듭된 질문 속에서 생겨난다. 북디자인은 저자와 독자를 연결한다는 목적 아래 시각적인 의도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진행해야 하는 원고와 디자인 의뢰서를 분석해 편집자와 회의를 한다. 이때 편집자가 생각하는 원고의 기획 방향과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결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내 경우 편집자가 힘주어 반복하는 단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심결에 쓰는 형용사에서 뉘앙스를 캐치해 작업에 필요한 키워드를 쌓아간다. 그런데 이때, 서로 사용하는 단어가 전혀 다른 성질이라면?

예전에 진행했던 디자인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에게 ‘SIMPLE’이라고 쓴 카드를 보여주고 어떤 이미지를 연상했는지 질문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똑같은 답을 내놓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구는 고딕으로 된 글씨, 누구는 크고 검은 동그라미, 누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간단한 실험을 통해 우리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같은 표현을 쓴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편집자에게 질문을 거듭하고, 그 질문의 답을 통해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 질문은 이제 작업자인 나,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다. 왜 이 폰트를 쓰고 싶은가? 그 컬러가 가장 적합한가? 이미지가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커피 대신 이 책을 살 것 같은가? (그렇다고 책의 경쟁 상대가 커피라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며 형태의 논리를 찾고, 그 논리를 점검하면서 자기 확신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대세에 별 지장 없고 독자에겐 티도 안 나는 일들, 제목 위치를 사방으로 1㎜씩 옮기거나 글씨 크기를 0.5포인트씩 키웠다 줄이며 책에 가장 적합한 옷을 찾는다. 너무 쉽게 간파당하지 않되 막연한 수수께끼는 아니길 바라며. 물음표를 거쳐 느낌표이길 바라며. 한여름인데 패딩을 입히고 핫팩까지 들려 내보낸 것은 아닌지 확인, 또 확인한다.

기자명 정지현 (북디자이너)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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