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30일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이 “아이의 미래에 기지는 필요 없다”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다. ⓒ이령경 제공

오키나와와 미군의 악연은 1945년 4월1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4월1일 아침 요미탄촌 인근 중부 서해안에 상륙한 미군은 본섬의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해 2주일 만에 섬의 4분의 3을 제압했다. 누가 봐도 일본이 질 수밖에 없는 전세였지만 일본군은 본토 결선을 위해 6월 초부터 섬의 남부로 후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그 결과 엄청난 수의 일본군이 죽고 이미 군의 명령에 의해 남부 지역으로 피난 가 있던 주민들까지 온통 전투에 휘말렸다. 일본군은 주민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동굴로 밀고 들어가 식량을 약탈했으며 미군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하라며 주민들에게 강제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최고 책임자가 전사하자 포악해진 미군 또한 피난처에서 쫓겨난 주민을 무차별 사살했다. 6월22일 일본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자결하고, 8월15일 일본 정부가 항복한 뒤에도 오키나와 남부 지역에선 여전히 소규모 전투가 계속됐다. 9월7일 오키나와의 일본군이 항복 문서를 조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정식으로 오키나와전이 종결되었다.

1976년 3월 오키나와현 조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로 죽은 사람은 20만656명이다. 미군 전사자 또는 행방불명자가 1만2520명, 일본군 전사자 또는 행방불명자는 9만4136명(그중 오키나와 출신 군인과 군속 2만8228명)이다. 나머지 약 9만4000명이 오키나와의 일반 주민들이다. 굶어 죽거나 말라리아로 병사한 주민을 빼고도 민간인 희생자 수가 전투 전사자 규모에 육박한다. 당시 오키나와섬 주민 네 명 중 한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 셈에는 영국군과 식민지 조선·타이완 출신의 희생자가 빠져 있다. 오키나와전에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통상 1만~2만명 동원으로 추정할 뿐 황국신민이라며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한 일본 정부는 사망자, 행방불명자,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남부 지역 이토만시의 마부니에 당시 희생된 모든 사람들(국적·군인·민간인 불문)을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2021년 6월 현재 평화기념공원 내 ‘평화의 초석’에 이름이 새겨진 희생자는 총 24만1632명이다. 그중 조선인은 464명(한국 국적자 382명, 북한 국적자 82명)에 불과하다.

6월21일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 단식 투쟁 중인 구시켄 다카마쓰 씨(왼쪽)와 유족이 인사하고 있다. ⓒ우에다 케이시 제공

한국 유족과 참전 미군도 동참했다

매년 6월23일 평화기념공원에서는 오키나와 ‘위령의 날’을 맞아 전몰자와 전쟁희생자의 추모식이 열린다. 올해 추모식엔 공원 한쪽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인 구시켄 다카마쓰 씨(67)는 40년째 오키나와전 희생자의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매년 6월23일 추모식장에서 그는 발굴한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 보내주기 위한 ‘DNA 감정 설명회’를 열고, 이에 대한 집단 신청을 호소해왔다. 그런 그가 올해는 여전히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아 있는 남부 지역의 토사를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에 쓰지 말라며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헤노코에 건설 중인 미군기지는 역시 오키나와에 소재한 후텐마 기지(1945년 이후 미군 해병대의 비행장으로 사용되어왔는데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았다)의 대체용으로 바다를 매립해 짓고 있다. 2020년 현재 일본 전 국토의 0.6%밖에 안 되는 오키나와가 주일 미군기지 전용면적의 70%를 떠안았다. 미·일 동맹이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는 지역 차별 위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역 차별을 해소하자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여왔다. 특히 미군기지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대는 압도적이다. 나고시 시장, 현 지사, 현 의원이나 중의원, 참의원 선거 등에서 미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후보를 거듭 당선시켰으며 2019년 2월엔 현민 투표로 반대 의사(70% 이상)를 확고하게 나타냈다. 더구나 미국의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2020년 11월 보고서에서 ‘완성될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할 정도로 헤노코 앞바다는 기지 건설에 적합하지 않다. 실제로 2021년 현재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위한 매립 현황은 전체 공정의 10%도 안 된다. 워낙 공사가 어렵고 방대해서 매립을 위한 토사를 조달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는 주로 섬 북부 지역에서 매립재를 채취해왔다. 그런데 북부 지역 매립지에서 연약지반이 발견되었다. 일본 방위성은 2020년 4월, 매립에 필요한 1689만9000㎥의 약 2배에 해당되는 3159만4000㎥의 토사(현 내 조달량의 약 70%)를 남부 지역에서 조달하겠다고 오키나와현에 매립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구시켄 씨가 남부 지역 토사가 매립에 쓰인다는 사실을 안 것은 지난해 11월1일이다. 평소처럼 남부 지역 산야에 유해 발굴 작업을 하러 갔더니, 채굴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구시켄 씨는 바로 유해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지난 3월1일에는 남부 지역의 토사 채취 반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격전지였던 남부 지역의 천연동굴이나 산림에는 아직도 많은 유해가 남아 있다. 그곳에서 대량의 토사를 가져가면 당연히 유해가 섞여 들어갈 것이다. 그동안 구시켄 씨는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이들의 유해와 마주해왔다. 유해가 전하는 ‘전쟁의 기록’을 남겨왔다. 그는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를 전쟁용 기지 건설에 쓰겠다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호소에 많은 시민과 단체들이 동참하면서 오키나와 의회가 움직였다.

2019년 2월15일 오키나와 기노자촌에 위치한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에서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 씨(오른쪽)와 박선주 충북대 교수(가운데)가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정치인은 대답이 없다

지난 3월 말 나하시 의회를 비롯한 8개의 지방의회가, 4월15일에는 오키나와현 의회가 ‘오키나와전 전몰자의 유해 등이 포함된 토사를 매립에 사용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의견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자민당과 공명당 소속 의원들도 하나가 되어, 총리를 비롯해 후생노동성(후생성), 방위성, 외무성 대신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고 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몰자의 유해를 수습하라고 요구했다. 전국 방송에서도 구시켄 씨의 유해 발굴 활동과 호소를 심층보도하기 시작했다. 7월2일 나라현 의회도 오키나와전 전몰자의 유해가 포함된 토사를 사용하지 말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가결하고 이를 총리와 관계 부처에 제출했다. 7월8일에는 ‘평화를 기원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유족회’가 후생성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대 서명을 방위성과 후생성에 제출했다.

한국의 유족과 오키나와전 참전 미군도 동참했다. 국제평화단체 ‘류큐·오키나와 평화를위한참전군인회(Veterans For Peace-Ryukyu-Okinawa)’가 7월15일 오키나와 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남부 지역 토사 이용 반대 결의안을 미국 본부에 보냈다. 오키나와전에서 실종된 미군은 200명 이상으로 남부 지역에 유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유족들은 DNA 감정을 신청했다. 6월20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가 한국인 유족들도 집단 DNA 감정 신청에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전몰자의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의 우에다 게이시 씨에 따르면 7월 중순 한국 유족 2명이 일본 후생성에 DNA 감정 신청을 했다. 이 신청자들의 아버지들은 오키나와 어디서 어떻게 전사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미 유족과 관계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2016년 국가의 책무로서 오키나와나 해외에 남아 있는 전몰자의 유해를 수집하고 DNA 감정을 실시하도록 정한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이 제정되어 있다. 전몰자의 유해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후생성은 2016~2024년을 유해 수집 집중 기간으로 정해 작업 중이다.

유해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호소가 오키나와에서 전국으로, 국경을 넘어 국제 연대로 이어지는 이유는 전쟁 희생자의 유해 수습이 국가가 져야 할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 유해들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채취한 토사에 유해가 섞일 일이 없다 하더라도,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피와 살이 스며든 땅을 새로운 전쟁 기지 건설에 쓰겠다며 후벼 파는 것 자체가 패륜이다.

방위성은 토사 채취 지역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며 채취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후생성도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한다. 전몰자들을 ‘천황을 위해 산화한 영령’으로 소환해 애국심 발양에 동원하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 오쓰지 히데히사는 후생성 장관 출신으로 ‘일본전몰자유골수집추진협회’ 회장이다. 이 협회는 매년 후생성으로부터 4억~6억 엔 규모의 예산을 받아 위령 사업과 유해 수집 사업의 실무를 담당한다. ‘Choose Life Project’라는 단체가 유해 섞인 토사 이용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오쓰지 회장은 ‘모두 같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대표이고, 협회 부회장도 같은 모임 소속 의원이다. 8월15일 구시켄 씨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유해를 지키고자 3차 단식투쟁을 하고, 두 의원은 모임을 대표해 ‘영령’에 참배를 했다.

2015년 관방장관 시절 자신은 전후 출생이라 오키나와 역사는 잘 모른다고 답했던 스가 총리가 올해 오키나와 위령의 날, “오키나와가 입은 깊은 상처를 우리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추모했다. 그의 말이 진심에서 비롯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설사 의례에 불과하더라도 스가 총리의 다짐이 과거를 구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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