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1970년 나가시마의 한센병 요양소에서 재일조선인 입소자들이 추석 명절을 즐기는 모습.

지난해 6월28일 일본 구마모토 지방법원은 한센병 환자의 가족들이 일본 정부에 청구한 손해배상 집단소송에서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가족들이 주장한 피해가 일본 정부의 한센병 환자 격리 정책으로 인한 인권침해라고 인정했다. 또한 환자와 그 가족이 국민들로부터 편견과 차별을 받아 가족관계 형성을 저해받았다고도 지적했다. 실제로 차별 경험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힘든 가족도 결혼이나 취직 때 차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나 심리적 부담 때문에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인정했다. 2001년 5월 한센병 회복자들이 같은 취지의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가족들은 격리 대상이 아니라며 인권침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2001년에 이어 이번에도 정부는 항소를 포기했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했다.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고 2005년 구마모토의 국립 요양소 기쿠치 게후엔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한센인 여성이 떠올랐다. 그는 다른 일본인 회복자의 시선을 피해 필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식민지 지배와 분단에서 조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까지 그의 말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질곡과 삶의 무게에 압도당했다.

2019년 봄 ‘언제부터, 왜 재일조선인 한센병 환자가 일본 요양소에 수용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주는 소중한 책이 나왔다.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 학예사인 김귀분의 〈재일조선인과 한센병〉이라는 책이다. 그는 오랫동안 일본 전역 한센병 요양소의 회복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신뢰를 쌓았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재일조선인으로서 한센인과 인터뷰를 했고, 각 요양소의 한센인들이 남긴 기록이나 기관지 등 자료를 읽어가며 재일조선인의 생애와 한센병의 역사를 써냈다.

ⓒ김귀분 제공2011년 7월 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 열린 기획전시. 맨 왼쪽이 〈재일조선인과 한센병〉 저자 김귀분씨.

재일조선인 52명 요양소 생활

과거 나병이라 불린 한센병의 또 다른 이름은 ‘식민지병’이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같이 가난한 식민지에서 열악한 위생과 생활환경으로 인한 감염과 발병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귀분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일본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의 평균연령은 85.5세이고, 입소자는 총 1333명이다. 이 중 재일조선인은 52명(남성 23명, 여성 29명)으로, 요양소 7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과거를 추적해보면 오키나와와 아마미를 제외한 국립 요양소 10곳과 사립 요양소 3곳에 조선인의 입소 기록이 남아 있다. 1909년에 개설된 젠세 병원(현, 다마젠세엔·多磨全生園)에는 1922년에 이미 조선인 입소 기록이 남아 있다. 오카야마현 오쿠코묘엔(邑久光明園)의 조선인 환자는 1923년 1명, 1945년에는 전체 입소자 871명 중 76명, 1955년에는 전체 입소자 963명 중 113명으로 늘었다.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보면, 1959년 전국 국립 요양소 조선인 입소자 수는 704명까지 늘었다가 감소하는데, 1971년까지 일본 전체 입소자 수의 6% 전후를 유지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재일조선인 비율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오쿠코묘엔의 한센인 허순자씨는 조선인 환자들이 많아서 든든하기도 했지만, 자기나 그들의 기구한 인생을 한탄하며 자주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한센병에 걸린 조선인 대부분은 단순 노동자로 일본에 온 사람들이다. 먹고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일본에서의 생활도 역시 가혹하고 열악했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이한 한센인 가족들은 모두 이산가족이 되었다. 가족이 환자를 버리고 가거나, 가족들이 함께 고향으로 가자고 해도 환자는 주변의 천대와 가족들이 받을 차별이 무서워 요양소에 그대로 남았다. 실상은 환자가 고향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미군정은 1946년 조선인 한센병 환자의 조국 귀환을 법으로 금지했다. 그런데 1951년 10월4일 공포된 출입국 관리령에 일본 국적이 아닌 한센병 환자의 국외 강제송환 조항이 포함되면서, 언제 강제송환 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재일조선인 한센인들은 일본의 요양소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된다. 요양소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감옥이었다. 1909년 실시된 한센병 환자 격리 정책이 1931년 모든 환자로 확대된 탓이다. 당시 일본제국은 모든 한센병 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 배제시켜 ‘문명국’이 되고자 했다. 이 정책은 1950년대 특효약이 개발되어 병이 완치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한센인들의 오랜 투쟁 끝에 1996년에야 겨우 철폐되었다.

1945년 이후에도 여전히 예산이 부족했던 요양소는 환자에게 ‘환자 작업’이라는 노동을 강요했다. 남녀노소, 증상을 불문하고 모든 환자는 도로 정비나 건축, 빨래, 식사 준비, 농사, 게다가 중증 환자 돌보기나 간호에까지 동원당했다. 그렇다 보니 입소 초기에는 증세가 가벼웠던 환자도 중노동과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치료가 부실해서 병세는 더 악화되기 일쑤였다. 이곳에서도 조선인들은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나가시마 아이세엔에는 요양소 내의 도로나 주택 개척에 공헌한 재일조선인 한센인 구봉수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오랜 세월 한센병 회복자·환자 운동을 위해 헌신해온 ‘다마젠세엔 입소자 자치회’ 전 회장 김상권씨의 회상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성실하기도 했지만, 일본인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기 싫어서 더 열심히 일했다.

조선인 한센인들에게 말과 문화가 다른 일본인과 함께하는 집단생활은 어려웠다. 특히 교육 기회를 박탈당해 일본어를 못하는 여성들은 어려움이 더욱 컸다. 그래도 기를 쓰고 열심히 살았다. 여성 중증 환자들 대부분은 머리가 엉망이어서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괴로워했다. 이를 개선하고자 한 재일조선인 여성은 당시 사회에서 유행하던 파마를 요양소에서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요양소의 허락으로 들어온 기술자 옆에서 파마 기술을 보고 익혀 직접 파마를 하기 시작했다. 병의 후유증으로 손이 자유롭지 못해 실패도 많이 했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 미용 일을 하면서 12명에게 미용 기술을 가르쳤다.

1950년대 말부터는 몇몇 요양소에서 일본어를 못하는 재일조선인 1세들을 대상으로 일본인 환자들과의 원활한 공동생활과 작업을 위한 일본어 강습이 실시되었다. 한국말을 못하거나 쓸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한 말과 역사 강습회도 열렸다. 김귀분에 따르면 이들의 모국어 습득 욕구는 단순히 모국에 대한 향수가 아니었다. 많은 일본인 입소자 속에서 스스로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걸 절감하면서 모국어 습득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욕구의 발로였다.

ⓒ국립한센병자료관 제공한센병 요양소에서 재일조선인 입소자들이 한글을 배우는 모습.

연금 지급 이후 일본인과 관계 악화

재일조선인 한센인들은 연금 획득을 위해 집단행동에도 나섰다. 1945년 이전에도 몇몇 요양소의 조선인들은 단체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했다. 1959년 4월16일 제정된 국민연금법이 요양소의 입소자에게도 적용되면서, 이듬해까지 전국 10개 요양소에 조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1959년 12월 ‘전국 한센병 환자협의회(전환협)’의 산하 조직으로 결성된 ‘재일조선인·한국인 한센병 환자동맹(동맹)’도 “재일조선인 환자 700명의 친목을 도모하고, 국민연금 시행 이후 강해진 민족적·경제적 차별에 맞서 우리들의 생활과 복지를 지키기 위해 단결하고 통일된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전국 조직이었다.

재일조선인 한센인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동일한 1급 장애인이더라도 일본인에게는 매달 지급되는 장애복지연금 1500엔, 노령복지연금 1000엔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연금 수급 이후부터는 동일한 ‘환자 작업’을 하고도 일본인과의 수입 차가 무려 3배에 달했다. 가난해도 같은 처지였던 조선인과 일본인은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는 사이였지만, 연금 지급 이후에는 경제적 격차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인 한센인의 역사적 경위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편견을 지닌 일부 일본인들은 귀화도 하지 않고 연금만 요구한다며, 재일조선인 한센인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생존의 문제였기에 재일조선인 한센인 단체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민단중앙본부, 조총련중앙본부, 국회의원, 후생성, 대장성에 탄원서 수백 통을 보내고 후생성 앞에서 농성을 했다. 이들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자기들을 차라리 죽이든지, 자기들만 따로 모아 격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1962년부터 매달 외국인특별위안금 500엔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1972년부터는 장애복지연금 1급에 해당되는 금액을 외국인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승리는 동맹과 전환협, ‘전국 한센병 맹인연합협의회’의 공동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반도에 그어진 38선이 일본의 요양소에까지 대립 구조를 낳았다. 한국과 민단, 북한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동맹과 각 요양소의 지부가 사상 대립을 벌였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후에는 한국 국적 취득을 둘러싸고도 갈등을 일으켰다. 1990년대 한센인들은 사상 대립을 극복했지만 조국 분단은 여전하다.

김귀분은 한센병 요양소가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과 배제에 맞서 투쟁하며 공생의 길을 개척해온 재일조선인 단체와 전환협, 전국 한센병 맹인연합협의회의 투쟁에서 상생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귀분의 책 〈재일조선인과 한센병〉은 일본의 한센병 역사에서 삭제된 재일조선인 한센인들의 역사를 복원했다. 재일조선인 한센인들의 역사는 한국 한센병 역사이기도 하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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