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영국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가 신미양요 당시 격전지였던 광성보에서 찍은 조선군 시신.

올해는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150년 되는 해다. 그리고 조선에 처음으로 사진이 등장한 지도 150년이 됐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의 첫 사진은 우리가 찍은 것이 아니라 외부인이 우리를 찍은 것이다. 바로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 해군을 따라 들어온 한 영국 사진가에 의해서다. 공식적으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조선이 등장한 것은 신미양요가 일어난 1871년 6월10일로부터 3개월이 흐른 뒤 미국 잡지 〈하퍼스 위클리〉의 지면에서다. 하지만 당시에 망판 기술이 없어서 인쇄에는 사진을 복제한 판화가 쓰였다. 바로 이 사진을 찍은 영국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는 잡지 기고에 만족하지 않고 일명 〈신미양요 사진첩〉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선 사진 총 47점을 판매했다. 현재 원본 유리판과 프린트는 미 해군과 게티 박물관 등에 분산되어 소장 중이다. 국내에는 ‘구한말 풍경’ 등의 화보집을 통해 사진 일부가 공개된 바 있다.

이탈리아 출신 영국인 베아토는 유명 사진가였다. 크림전쟁을 시작으로 인도와 중국에서 인상적인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일본에서 사진관을 열어 오리엔탈리즘 물씬한 사진을 찍어 판매했다. 마침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보복 공격을 준비하던 미 해군의 종군기자로 따라나서 조선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의 사진 작업은 대개 아시아에서 이뤄졌으며 서구 제국주의자의 선정적인 눈으로 침략과 지배의 정당성을 일관되게 표현했다는 특징이 있다.

지난 5월14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회의’에서 〈제국의 렌즈로 본 신미양요-펠리체 베아토의 종군 사진을 중심으로〉를 발표한 이경민 사진아카이브연구소 대표는 “전쟁사진가로서 베아토의 이력과 명성은 결국 ‘타자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상품화한 것에 대한 서양인들의 암묵적 동의와 지지하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간파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들은 “사진이라는 근대적 매체가 제국주의에 어떻게 봉사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사례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베아토의 사진은 사실 조선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자료라기보다 제국의 렌즈에 포착된 조선이 중국·일본과 마찬가지로 개척되거나 정벌되어야 할 대상으로 상징된 것이다.

패전이었던 전투를 새롭게 조망

신미양요는 오랫동안 근대사에서 묻혀버린 소재였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친미파였던 이승만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랬던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덕진진·초지진이 구국의 성지로 재탄생한 것은 1970년대 말 박정희에 의해서였다. 핵 개발을 두고 미국과 마찰을 빚던 박정희가 강화도의 관방 유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안보 관광지로 만든 것이다. 대놓고 반미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인 경고였던 셈이다.

하지만 박정희도 죽고, 미국의 묵인 아래 5·18 학살을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이후로도 오랫동안 잊혔던 신미양요는 2018년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로 부활했다. 이 드라마의 광성보 전투신은 베아토의 사진을 기초로 구성한 듯 보인다. 흑백임에도 붉은 피 냄새가 흠씬 나는 사진을 기초로 피사체에 불과했던 우리가 역사적인 재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완전한 패전이었던 이 전투를 비로소 새롭게 조망할 여유가 생긴 셈이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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