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미얀마 양곤 산차웅 지역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했다. ⓒK Zin

“지금 미얀마엔 신문이 없어요.” 미얀마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투 자 씨가 말했다. 군부의 대대적인 언론통제로 민영 언론사 대부분이 편집국 운영을 중단한 후 SNS로 본거지를 옮겼다. 현지 독립언론 〈미얀마 나우〉는 온라인판에서 “2021년 3월17일은 미얀마에서 언론자유가 완전히 사망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이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간지 〈스탠더드 타임〉이 운영을 중단하며 미얀마에는 독립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는 곳이 모두 사라졌다. 〈미얀마 나우〉도 3월7일 군부가 강제 폐쇄한 언론사다. 반쿠데타 시위를 적극 보도해온 매체다. 오프라인에서 살아남은 곳은 군부 소유 매체뿐이다.

3월16일 〈시사IN〉은 국내 미얀마 활동가를 통해 ‘현지 언론을 돕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짧은 시간에 현지 언론인 수십 명에게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쏟아졌다. 그중 현직 기자 10명과 연락이 닿았다. 3월21일과 22일 〈미얀마 노동뉴스〉 기자 케이 진(활동명), 프리랜서 기자 투 자, 소수민족 이슈를 다루는 독립언론 〈탄르윈켓 뉴스(Than Lwin Khet News)〉의 편집장 제 야 민 씨와 줌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넷이 끊긴 상황에서 어떻게 보도를 이어가고 있는지, 군부의 언론 탄압은 어느 정도인지, 이번 시위가 기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들을 수 있었다.

투 자 기자는 현재 양곤을 떠나 피신 중이라고 했다. 3월14일 양곤의 흘라잉타야 지역에서 군경이 시위대를 강제진압하는 현장을 SNS로 생중계한 후 동료에게서 “표적이 되었으니 일단 숨어 있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보호 장비는 충분히 있느냐”라고 묻자 투 자 씨는 “군경이 기자를 체포하고 있어서 ‘PRESS’가 쓰인 헬멧과 조끼를 입으면 더 위험해진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투 자 씨는 기자 일을 그만뒀다. 친척이 하는 온라인 쇼핑 사업을 도왔다. 그러던 중 2월1일 쿠데타가 터졌다. 과거 십수 년간 군부 집권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뀐 게 없다’는 좌절감이 컸다. 그는 '지금껏 해온 게 기자 일이니 내가 가진 지식과 힘으로 싸워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전에 일했던 주간지 〈프라이데이 타임스〉 편집장에게 연락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돌아온 답은 “페이는 못 준다”였다. 투 자 씨는 “〈프라이데이 타임스〉의 페이스북 구독자가 20만명에 이르니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답했다. 남편과 일곱 살 딸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지금 미얀마는 인터넷도, 언론의 자유도 없다. 이런 미래를 내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2020년 국경없는 기자회(RSF)는 미얀마의 언론자유지수가 180개국 중 139위라고 보고했다. 2021년에는 더 추락할 것으로 보인다. 3월8일 미얀마 군사정권은 독립언론사 5곳의 출판 허가를 취소한 데 이어, 기자 개인을 겨냥하고 나섰다. 3월12일 독립언론 〈이라와디(Irrawaddy Media)〉는 군부가 기자 10명을 고소하고 12명을 재판 없이 구금했다고 주장했다. 기자들에 대해 ‘공포, 가짜뉴스 유포, 직간접적 공무원 선동’ 혐의가 적용되었다. 〈이라와디〉의 사진기자 조 조 씨는 3월19일 “집에서 지내기 두려워 여기저기 잠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군부가 기자를 억압하는 이유는, 진실이 국제사회에서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치명상을 입자 이를 보완한 건 시민들이었다. 양곤의 시위대 조직가인 민 테인 툰 씨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여러 장 보내왔다. 미얀마의 현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길 바란다며 국내외 기자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미얀마에서는 이들을 ‘시민기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2월15일부터 군부는 새벽 1시~오전 9시 모든 인터넷을 차단했다. 현재 미얀마 시민들은 VPN(가상사설망), 유선 인터넷과 타이 유심카드(로밍)로 버티고 있다. 〈탄르윈켓 뉴스〉의 제 야 민 편집장은 “타이 유심카드는 7기가에 2만 짯(약 2만5000원)인데 일주일만 사용 가능하다. 취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비용이 부담된다”라고 말했다. 이마저도 언제든 끊길 수 있는 상황이다. 몇몇 기자는 연락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해 전화번호를 남기기도 했다.

군부의 언론통제로 미얀마 언론사 대부분이 운영을 중단했다. 2월26일 양곤에서 기자를 쫓고 있는 경찰. ⓒTwitter

타이 유심카드 하나로 일주일 버틴다

10년 차 사진기자인 케이 진 씨는 시위대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었다. 나무 방패를 들고 최루탄을 피하는 청년, 20대 사망자의 장례식, 총탄이 박힌 자국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밤에 끌려가서 아침에 시신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봤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간 군사정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분위기가 삼엄해지면서 카메라를 꺼내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한국 정부나 한국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경찰에 체포된 기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해달라”고 말했다. “군사정부에게는 이런 메시지 하나하나가 압박이다.”

제 야 민 씨는 도피와 취재를 병행한 지 한 달째다.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어디든 숨어야 한다. 근처 주민들의 집에 무작정 들어갈 때가 많다. 그런데 매번 종교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숨겨주더라.” 제 야 민 기자에게 지난 50여 일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혼란이 장기화되면서, ‘기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싶은 무기력감도 커진다. 10~20대 청년들이 길에서 쓰러지는 화면을 편집할 때 특히 그렇다.

시민불복종운동(CDM)이 미얀마 반쿠데타 시위를 움직이는 한쪽 바퀴라면, 다른 쪽에는 시민 기자와 언론인이 있다. 민 테인 툰 씨는 “시민들이 겪는 고통이 낱낱이 알려지고, 정보가 공급되어야 이 혁명적인 운동도 계속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얀마의 참상은 SNS로 계속 알려지고 있지만 혼란이 길어지면서 국제사회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제 야 민 기자는 이렇게 당부했다. “한 달 넘게 수입이 없어서 취재에 필요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프리랜서들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해외 매체들과 연대하거나 기금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끝까지 해보려 한다.”
 


미얀마의 미래를 '투표'로 응원합니다

〈시사IN〉이 사회적 협동조합 ‘오늘의 행동’과 함께 ‘미얀마의 미래를 투표로 응원합니다’긴급 캠페인을 벌입니다. 4·7 재보선을 계기로 우리가 행사하는 한표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기억하는 한편, 지난해 선거 결과를 존중해달라고 호소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안내에 따라 투표 인증샷을 찍고 #WatchingMyanmar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올려주세요. 이번 캠페인에는 4·7 재보선을 치르는 지역은 물론 치르지 않는 지역의 시민들도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의 미래를 투표로 응원합니다’ 캠페인 바로가기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338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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