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공정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질문이다. 때로는 세대 차를 확인하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명색이 노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비켜가기도 어려운 게 요즘 분위기다. 기껏해야 지렁이가 기어간 자국에 불과하겠지만 공정에 대해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는 이유다.

내 고민은,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천적으로 공정의 가치를 추구할 수는 없을까 하는 점이다. 공정의 가치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그칠 이유는 없다. 가령 일터에서 노동자의 생애주기는 입사에서 퇴사에 이르는 전 과정, 즉 교육·훈련, 배치, 직무수행, 평가, 인사·승진, 임금 및 근로조건의 결정이라는 영역을 건너간다. 일터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과정을 공정의 시선으로 점검해볼 수는 없을까라는 게 내 질문이다. 공정의 일상화이자 전면화라고 할 수 있다. 공정의 문제가 일터 안에만 머무르는 건 아니다. 원·하청 기업 간, 모회사·자회사 사이에서 왜 고용의 안정성이나 보상에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도 공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

일터와 사회의 합의가 공정의 판관

일터에서 공정을 바라보면 세 단계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공정의 첫 단계는 능력에 따른 대우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가 공정이라는 건 착각이라고 말하지만 초보적인 능력주의조차 지켜지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일터에서 ‘줄(연줄)’이 ‘백(뒷배)’이 되고 그것이 뭉쳐 ‘마피아(파벌)’를 형성하는 건 익숙한 풍경이다. 젊은 세대가 공정의 이름으로 ‘조국 사태’를 비판하는 건 정당하다. 나아가 기준과 절차조차 불투명한 인사(채용·승진·배치)를 비판하고, 올라가는 사다리의 칸이 너무 넓은 걸 따지고, 하는 일이 같아도 임금이 다른 걸 걸고넘어져야 한다.

공정이 능력주의에 머무르면 또 다른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은 옳다. 그것은 금수저와 흙수저가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능력 차이에 따른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그 능력의 상당 부분이 개인의 노력이 아닌 운에 기대고 있다면 알량한 능력의 우위를 코에 걸고 다닐 일은 아니다. 공정을 위해서는 능력주의 너머를 봐야 한다.

능력주의 너머에 존재하는 공정의 가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대, 곧 적극적 차별 시정조치다. 이때 공정은 ‘차별적 특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여성할당제나 비례제, 장애인 의무고용제, 지방 출신자 가산제, 비정규직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겠다는 경기도의 조치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지점에서 공정은 연대나 공동체의 가치와 만난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공정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게 정당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수집단에 대한 우대라는 가치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정은 야누스적이다. 능력주의라는 얼굴과 적극적 차별이라는 얼굴을 동전의 양면처럼 갖는다.

공정이 모순된 얼굴을 갖는다면 현실적으로 ‘공정의 판관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 절차는 어떻게 설계되는가, 능력 차이에 따른 보상의 격차는 누가 정하는가, 나아가 소수집단을 우대한다면 얼마만큼의 특혜를 어떤 방식으로 부여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답은 어렵지 않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감의 폭을 넓혀나가면 된다. 물론 이해당사자의 참여는 필수다. 이해당사자들이 일터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합의가 바로 공정의 판관이다. 일터 민주주의의 요체가 참여라는 점에서 공정은 일터 민주주의와 함께 간다. 여기까지가 내 고민의 흔적이다. 지렁이가 혼자 기어가듯 횡설수설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기자명 박태주 (노동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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