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5일 서울 용산고등학교에서 치러진 서울시교육청 지방공무원 신규임용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학교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엘리트 세습(Meritocracy Trap)〉이라는 책의 추천사를 썼다. 책은 세계 최고 명문이라는 미국 예일 대학 로스쿨을 나온 엘리트 변호사, 스탠퍼드 대학 출신의 실리콘밸리 엔지니어 및 기업가 등이 얼마나 ‘빡세게’ 사는지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고전적 엘리트들은 바쁜 경영 업무는 ‘집사’와 비슷한 지위인 ‘월급쟁이 사장’에게 떠맡기고 유유자적 사는 것이 하나의 규범이었다고 한다. 요트나 말을 타고 비싼 요리를 먹으며 한담을 나누는 게 고전적 엘리트들의 ‘일’이었다는 것. 그러나 최근의 엘리트들은 하루에 17시간씩 일하며 ‘자본소득’보다 높은 ‘근로소득’을 올린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그러다 보면 과로로 병들고 일찍 죽기 십상이지만 벌어놓은 돈 덕분에 그럭저럭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아 ‘부활’해가면서 말이다. 책을 놓고 생각했다. ‘이 능력주의는 한국의 능력주의와 다른 이야기다.’

미국식 능력주의(고전적 엘리트가 아니라 최근 엘리트들의)가 한국엔 없다는 소리인가? 그렇다. 한국에서 ‘능력주의(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공정’과 짝을 이루는 개념)’로 불리는 것은 미국식 능력주의와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입시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해온 사회다. 고려 및 조선 시대에도 과거로 엘리트를 뽑았다. 시험 합격은 곧 출세였다. 권력의 세습보다는 ‘실력을 통한 쟁취’라는 관념이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었다(동아시아 전반에 흐르는 정서이기도 하다). 이 같은 성공 방정식은 근대사회가 도래하고 대한민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80년대 이전까지 대학 입학은 ‘예비 엘리트’, 전근대 사회식으로 표현하자면 ‘진사’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인원이 동년배의 20%가 채 되지 않았다. 진학자 중 일부가 이른바 ‘3대 고시’를 봤다. 나머지는 대기업에 들어갔다. 대학에 진학하면 그럭저럭 ‘사회지도층’으로 갈 수 있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들이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자신감도 거기에 있다. 가난한 농촌 출신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면 해당 가구에서는 살림 밑천인 소를 팔아야 했다. 고등교육 정원은 끊임없이 증가했고, 대학 역시 특히 1990년대에 우후죽순 늘어났다. 그 결과, 일반적인 대학생의 위상은 이미 2000년대 직전부터 예전 고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졌다. ‘보편적 고등교육’의 탄생이다. 대학은 동년배 인구의 70%가 가는 곳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대학 간 격차가 심화된다. 거점 국립대들의 ‘입결(최소 합격 점수/등급)’이 폭락한 반면 서울 소재 사립대와 이른바 ‘명문대’의 위상은 더욱 강화됐다. 이런 가운데 서울 소재 사립대와 이른바 명문대생들의 ‘서사’ 역시 승리해버린다. 예컨대 ‘내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시험공부를 해서 경쟁에서 승리했으니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시험 보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진 낙하산, 시험 보지 않고 전환된 정규직 등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대학 입학은 수능, 면접은 주관성을 줄이기 위해 인공지능(AI), 가능하면 기업들도 삼성 직무적성검사(GSAT) 같은 시험으로 직원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5주기를 앞둔 5월24일 서울 구의역 승장강에서 헌화하는 사람들. ⓒ연합뉴스

말썽의 출발점엔 ‘시험 이외의 방식’ 있다

문제는 시험만으로는 그 대상자의 ‘업무역량’이나 ‘일머리’ 혹은 ‘사회적 관계 맺기’ 같은 일과 삶 모두에서 필요한 능력을 측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업과 정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대안적인 사람 뽑기 방식’을 도입하려 한다. 수시채용, 인턴십 등 시험과 다른 종류의 방법으로 사람을 선발해서 조직의 ‘다양성’을 보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동년배들 가운데 10~15%(서울 소재 4년제 대학+지방 거점대학 출신)들은 ‘주관성’이 개입하지 않는 ‘공정한 시험’을 요구한다. 최근 한국에서 ‘능력주의’나 ‘공정’과 관련된 모든 말썽의 출발점엔 수시 입학사정관제, 로스쿨, 의학전문대학원,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공공의대 등 ‘시험 이외의 방식’이 있었다.

그러나 수능 상위 10~15%의 청년들이 아무리 공정을 내세운다 해도 이를 미국식 능력주의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미국식 능력주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끊임없는 자기 착취와 노동을 통해 스톡옵션을 획득한다거나 혹은 더 높은 몸값과 대우를 찾아 끊임없이 이직하는 삶을 하나의 표준으로 본다. 이에 비해 10~15% 청년들이 말하는 ‘공정한’ 혹은 ‘정의로운’ 결과는 ‘시험 합격으로 인생역전한 뒤엔 그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동아시아식 입신양명 개념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능력주의가 아니라 ‘합격주의’ 혹은 ‘시험주의’라고 부른다. 10~15% 청년들은 역설적으로 ‘공정’을 부르짖지만, 그 공정의 실질적 내용은 ‘정규직의 울타리(대기업·공기업)’ ‘고용과 승급에 법적 보호를 받는 지위 획득(공무원)’ ‘연공서열제로 정년까지 꾸준히 임금 상승(대기업·공무원·공기업 공통)’ 등의 조건을 지키겠다는 것 아닌가? 전근대 동아시아의 ‘성안 사람’으로 편입되어 ‘해자’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지위를 사수하겠다는 것은 능력주의나 공정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더나 구글의 개발자처럼 성과를 못 내면 당장 해고당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 역시 바라지 않는다.

물론 이 같은 안정 지향성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가 정책을 통해 만들 수 있는 일자리가 대개 이 ‘해자’ 안에서 보호받는 직종이라는 데 있다. 정부가 ‘공정’ 요구에 대응해서 ‘공정한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10~15% 청년에게만 편익을 제공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예컨대 공기업을 지방 혁신도시에 이전해봤자 시험만으로 뽑으면 결과적으로 거점대학 출신들이 그 일자리들을 독점하게 된다.

이 같은 ‘공정’한 진입 경쟁과 아무 상관없는 경우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정확히는 하위 85~90%에 해당되는 노동시장 및 입시 시장에 위치한 청년들이 그렇다. 이들은 공정이란 담론과 상관없이 노동시장에 진입한다. 중견기업 이하 절대다수 업체들은 공채로 필기시험을 보지 않는다. 정확히는 시험을 실시할 만한 자원도 보유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업체들은 ‘사람이 필요할 때’ 수시로 채용하고, 신입 후보자나 기존 사원에 대한 평가체계 자체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근속이 올라간다고 임금이 상승하지도 않는다. 요즘 노동정책의 이슈 중 하나인 직무급을 받지도 않는다. 대개는 ‘최저임금+알파’ 수준에서 업체의 여유나 사용주의 의사에 따라 임금수준이 결정된다.

공정과 능력주의 담론의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연합뉴스

불만을 담아낼 적절한 언어가 없는 청년들

게다가 여성 노동의 경우 수도권만 벗어나면 아예 ‘정규직 일자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무보조직이나 준전문직(어린이집 교사·간호사·물리치료사·치위생사 등) 일자리만 즐비하고, 여성들이 많이 취업하는 서비스업 계통의 사무직 일자리는 산업의 영세성으로 말미암아 정규직을 뽑을 여유가 없다. 유튜브 드라마 〈좋좋소〉에 등장하는 이미나 대리의 지위마저도 그나마 수도권이니까 가능한 모델이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공정이나 능력주의 관련 담론을 아무리 읽고, 이 담론의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응원하더라도 이는 사실 85~90% 청년의 현실과는 큰 관련성이 없다. 사실 85~90% 청년들이 처한 하위 노동시장은 ‘원하청 차별’ ‘위험의 외주화’ ‘중소기업의 미숙한 경영’ ‘인사 청탁’ 등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관행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공정과 능력주의가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이런 청년들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체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영세하다. 또한 각 주체가 법률 같은 공적제도보다는 개인이나 작은 집단 고유의 자의적이고 자율적인 규범에 따라 행위한다. 정부가 일일이 개입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눈에 빤히 보이는 문제들 역시 해결되지 않고, 이렇게 되니 서로가 서로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그랬어?’라거나 ‘공부는 알아서 하는 거야’라고 상처에 소금 뿌리는 행태를 자조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그리하여 공정과 능력주의란 단어가 떠돌고 있지만 그 용법은 현실과 별로 상관없이 작용한다.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공정이라는 말은 고작 상위권 학생들이 평생 걱정 없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의 합의인 시험을 통한 선발에 불과하다.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하지만, 능력주의의 약속인 “박박 기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나아질 것”이라는 ‘성장’의 서사는 실제 합격으로 약속되는 ‘해자’의 일자리 앞에서 막히고 만다. 어쩌면 불평등의 출발은 능력주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정함을 외치고 능력주의에 기댄다고 그 자체가 백래시이거나 그 자체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불만을 말하는 청년’들이 불만을 담아낼 적절한 언어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청년들의 발화에 대한 잘못된 진단과 낙인이 불평등과 차별과 백래시 선동의 정치적 조직화를 허용한다. 그러니 우리는 개념들을 엄밀하게 작동시켜 새로운 정치를 재조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범생’들이 말하는 ‘공정’이라는 말, 평론가들이 말하는 ‘능력주의’라는 개념의 관성적인 정의를 전복시키고 새로 구성해야 한다.

기자명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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