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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이맘때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형형한 눈빛들 때문에 가벼운 조울(躁鬱)을 경험한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함께했던 시민들의 그 눈빛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잊힌 역사가 되었지만 인권헌장 제정의 한가운데 있었던 나로서는 그 눈빛들과의 추억이 인권헌장을 기념하는 연례 체험 방식이 되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은 시민이 주체가 되어 토론하고 숙고하여 만든 시민참여형 모델이었다. 이른바 숙의민주주의다. 2014년 8~12월, 축구장처럼 넓은 회의실에서 180명의 시민위원과 전문위원들이 조별로 토론을 벌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열띤 의견이 오갔고 다종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졌다. 생업을 마친 고단한 몸으로 회의에 참석한 시민위원들의 눈빛은 토론이 무르익으면서 반짝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울시가 일부 특정 종교 세력에 굴복해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시민위원들의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성소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인권헌장 조항에 대해 그 종교 세력들은 무조건 반대하며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을 압박했다. 결국 시민들끼리 인권헌장을 발표했고, 자괴감과 뿌듯함이 교차하던 눈빛에서 얼음장 같은 결기가 묻어난 것은 혹독한 그날의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올해 유난히 그 눈빛들이 아른거린 것은 지난 6월 발의된 차별금지법 때문인 듯하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은 2007년 법무부의 차별금지법안이 무산된 지 13년 만에 법안을 내놓았다. 당시 법무부 안에 들어 있었던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법안은 국회에서 좌초됐다.

정부와 국회가 그 같은 반인권적 주장 앞에서 엉거주춤하는 사이, 우리 사회의 차별도 잠시 참고 기다려줬을까? 그럴 리 만무한 것은 정부와 국회가 더 잘 알 것이다. 인권 관련 법안 10여 개가 줄줄이 철회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선포되지 못한 이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조례 공청회장은 매번 난장판이 되었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뒤 시민사회는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법 제정을 위해 전력을 모으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평등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반대로 일부 개신교 교단과 교회는 법 제정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쏟고 있다.

이 와중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나 정작 보이지 않는 존재가 174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다. 평등법안을 준비한다는 말이 돈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드러난 변화는 없다.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는데, 소수자 인권은 일부 거친 목소리에 좌지우지될 정치 쟁점이 아니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국가가 그때그때마다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권인지 아닌지 ‘확인’하면 이를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차별금지와 평등권 보장은 기본권 중에서도 기본권이다.

선거 국면에서 차별금지법 또 물 건너가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4개월여 남았다. 여당과 야당에서 후보가 거론되면서 박원순 시장의 충격적인 죽음이 떠올라 괴롭다. 인생의 대부분을 시민인권 향상에 앞장섰던 그는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공표하겠다고 한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향후 엄중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겠지만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보궐선거 이후 곧바로 대선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차별금지법이 또다시 물 건너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무슨 이유를 대도 더불어민주당의 눈치 보기는 납득하기 어렵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선포하던 시민들의 그 서늘한 눈빛이 던지는 경고와 교훈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이번엔 기필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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