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마우스 유튜브 갈무리가짜뉴스 생산하는 유튜버 저격하는 유튜브 채널 ‘헬마우스’의 진행자 임경빈씨(오른쪽).

가짜뉴스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언론사의 오보, 인터넷 ‘찌라시’, 허위 정보 등에서부터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의 반대편에서 나오는 듣기 싫은 의견까지 일괄적으로 ‘가짜뉴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가짜뉴스들을 골라내 타격하는 유튜브 채널(헬마우스)을 운영하다 보면 종종 마주하게 되는 말이 바로 ‘표현의 자유’다.

채널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유튜버들은 1인 미디어다. 카메라 앞에 홀로 서서 자신을 표현한다. 어떤 이들의 영상에는 허위 정보, 흑색선전, 혐오 표현 등이 잔뜩 섞여 있다. 그런 조잡하고 악의적인 표현들로 규모를 키운 채널이라도 일단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하면, 1인 미디어이지만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 영향력은 결국 사회적 해악으로 돌아온다. 지난 8월 서울 광화문 집회로 인한 코로나19 확산은 그 극단적인 예시였다. 그 주최자들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아무렇게나 떠들어댄 말을 듣고 광화문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 유튜버들에 대해서도 어떤 종류의 규제가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 주체가 국가여야 할지 아니면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이른바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를 들어 규제를 반대하는 이들은 정확한 정보에 접근 가능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 1인 방송을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규제가 심해질 경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의견 표시에 심리적 제약이 걸리게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허위 정보와 혐오 표현 등으로 인한 사회적 해악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정확한 정보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의견만 표현하도록 규제한다면, 그런 사회가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에 기댈 수밖에 없다. 나와 동료들이 유튜브상의 가짜뉴스들과 혐오 표현을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하는 대신 ‘헬마우스’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어 그들을 비판하기 시작한 이유다. 신고는 효력이 없거나 제한적인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헬마우스 채널을 통해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주체를 비판하고 더 타당한 정보를 제공해 시민사회 차원의 판단이 이뤄지도록 돕고 싶었다. 말하자면 가짜뉴스 유포자들에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비평’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것이다. 솔직히 ‘비난에 가까운 비평’이긴 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비난한 유튜버들이 헬마우스를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한다. 그런 유튜버 중 어떤 사람은, 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당한 소송의 결과에 대해서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탄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에 산다지만 법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생활하기는 힘들다.

9월19일, 주호민 작가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사과 영상’을 올렸다. 전날 자신이 인터넷 방송에서 한 발언이 논란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특히 ‘시민독재’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연합뉴스주호민 작가는 “시민과 독자가 웹툰을 검열한다”라며 ‘시민독재’라는표현을 써 논란이 되었다.

‘시민독재’ 표현은 성역 침범 아니다

그는 “웹툰 검열이 진짜 심해졌는데 과거에는 검열을 국가에서 했다면 지금은 시민과 독자가 한다. 시민독재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된 이후 올린 사과 영상에서는 이 시민독재라는 표현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도, 어떤 다른 표현으로 대체해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창작자로서 표현의 자유가 점점 더 위축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도 “인권을 침해하는 작품은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려서는 안 된다”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시민독재’라는 표현이 ‘성역을 침범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개념적으로 논리적 모순이 없는지에 대해선 좀 헷갈린다. 시민의 의사표시 및 집단행동이 활발한 상황과 ‘독재’라는 규정은 잘 어울리는 쌍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을 독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운동을 활용해 정적을 제거하는 정치권력과의 결합이 필요하다. 극우파의 나치나 극좌파의 문화대혁명 같은 현상이 그러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정적을 나치나 홍위병처럼 묘사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나치나 홍위병 같은 현상이 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민들의 활동으로 인해 창작자가 자기검열의 필요성을 느끼는 지경이라면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런 상황이 타당한지 의문이 드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주호민 작가는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표현’에 대해서는 금기를 설정하도록 합의하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상황에 관해서는 함께 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실은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다.

비단 유튜브나 웹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총선 무렵에는 인디 밴드 ‘중식이밴드’가 대중의 구설에 올랐다. 중식이밴드는 당시 정의당과 총선 테마송 협약을 맺었는데, 돌연 정의당 지지자들과 일부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당하게 되었다. 그의 음악들이 ‘여성혐오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문화 창작물에 대한 비평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거기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비판이긴 했다. 문제는 다음에 터졌다. 중식이밴드는 페이스북에 ‘어딘가로부터 항의전화를 받고 무대에 오를 수가 없었다’라는 글을 올렸다. 창작물을 비판하는 것과 그 창작자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예컨대 중식이밴드가 정의당 총선 테마송을 맡기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취지의 비판 행동은 정치적 차원에서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중식이밴드가 정의당과의 활동을 그만둔 이후에도 징벌적으로 출연금지 압력을 받았다면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최근 만화가 기안84의 창작물 때문에 불거진 논란에도 창작물에 대한 비평의 문제와 그의 활동영역을 좁히려는 집단행동이 섞여 있었다고 본다.

문화 창작물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중식이밴드의 노래를 여성혐오적이라고 해석하지만 다른 이는 그냥 ‘세상의 꼴을 잘 투영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물의 표현방식이 윤리 교과서 같은 언어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예술은 악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창작물에 그려진 악은 악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며 사회적으로 창작자 자신의 의도와 다른 효과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법률이 보호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특정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는가’이다. 특정 사건이나 특정 개인에 대한 묘사는 그 관계자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헬마우스 채널이 다루는 대상들처럼 픽션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논평의 영역이라면 또 다른 잣대가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선 이 모든 요소가 복잡하게 뒤엉키며 명확한 판단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타인을)모욕할 자유’나 ‘혐오할 자유’ 또는 ‘허위 정보를 뿌릴 자유’ 등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행위들에 대해서는 제제를 가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재’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엄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법적 처벌도 마찬가지다. 모욕적인 표현을 제재할 때에는 모욕죄의 성립 여부와 형량을 판단하기 위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 문제를 법률적 절차보다 더 넓은 영역의 사회적 합의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수 있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사회적 합의의 절차까지 따로 고려해야 한다.

ⓒ연합뉴스2016년 3월29일 정의당 관계자와 ‘중식이밴드’가 20대 총선 TV 광고용 영상과 공식 테마송 협약식을 체결하고 있다.

시민적 합의 통한 플랫폼 압박

주호민의 ‘시민독재’라는 표현은 그 개념 자체로는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본다면, 기준도 절차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가해지는 제재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창작자의 비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호민을 비판하는 것 역시 자유의 영역이지만 창작자들의 불만과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문제에 대해선 법이 어느 정도 규율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의 집단행동이 창작자를 검열하는 문제에 대해선 ‘세상을 바꾸는 불매운동’이라는 상찬과 시민독재라는 비평 사이에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 이 중간 영역의 무언가다.

그러나 유튜브를 하는 처지여서인지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에 하나를 더 호출하고 싶다. 바로 플랫폼이다. 대부분의 창작물은 플랫폼을 통해 전시되며, 아주 힘센 창작자가 아니라면 플랫폼을 상대로 ‘갑’이 되긴 쉽지 않다. 소비자들의 집단행동 역시 플랫폼을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문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구축하려면 플랫폼에 대한 발언과 압박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만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 플랫폼에 돌을 던지기만 한다면, 플랫폼은 그때그때 보신적으로만 처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민적 합의를 구성해서 플랫폼을 압박할 수 있다면 훨씬 합리적인 기준이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수도 있을 터이다.

기자명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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