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PHOTO8월30일 한 여성이 〈샤를리 에브도〉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벽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그 모든 것이(Tout ça) 이것 때문에(pour ça).’

이것은 9월1일자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1면 헤드라인이다. 그 밑엔 2015년 테러 공격의 빌미가 됐던 문제의 풍자만화가 다시 실렸다. 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의 캐리커처가 들어간 만화 때문에 시작된 테러로 사흘 동안 17명이 사망했다. 5년 만에 이걸 다시 실은 건 9월2일 시작된 이 사건의 재판 때문이다. 무함마드 희화화가 ‘표현의 자유’인지, 특정 종교의 ‘혐오 표현’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그 와중에 〈샤를리 에브도〉 재판 소식을 전한 스위스 방송사 SRF에 불똥이 튀었다. 파리에서 〈샤를리 에브도〉를 읽고 있는 시민 모습을 화면에 내보내면서 문제의 만화를 흐리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엔 ‘SRF가 테러 세력에 굴복했다’ ‘표현의 자유를 포기한 것’ 등의 반응이 넘쳐났다. SRF는 제작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다고 즉시 해명했다. ‘테러리스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편집 방침이 있었는데, 프로그램을 제작한 PD가 그것을 ‘무함마드 캐리커처를 보여주지 않는다’로 잘못 이해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표현의 자유 논쟁이 유럽에서 여전히 결론 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언뜻 단일한 논쟁 같지만 여기엔 네 단계가 있다. 첫째,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풍자만화. 둘째, 2015년 테러 직후 미디어들이 보도하면서 자료로 내보낸 같은 만화. 셋째, 2020년 9월 재판 시작을 계기로 〈샤를리 에브도〉가 1면에 다시 실은 같은 만화. 넷째, 2020년 9월 〈샤를리 에브도〉의 재판과 만화 재발행을 보도하면서 다른 미디어들이 자료로 내보낸 같은 만화. 이 넷을 (1) (2) (3) (4)로 나누겠다.

이걸 구분하는 이유는 표현의 자유가 과연 무한대의 자유인지, 무한대가 아니라면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생각하기 위해서다. (1)은 창작만화이므로 예술 작품이고, (3)은 ‘사료가 되어버린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2)와 (4)는 보도자료다. 그중 시의성을 바탕으로 뉴스의 중대성을 따진다면 (2)가 더 크다.

단계별로 나타난 반응을 살펴보자. 예술 작품은 표현의 자유가 가장 넓게 적용되는 영역이니만큼, 무슬림 혐오 논란에도 불구하고 (1)은 허용돼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2015년 사건 직후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 추모 시위가 벌어졌고,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는 구호가 퍼졌다. 당시 페이스북의 내 유럽인 친구들 대부분이 프로필 사진을 그 구호로 바꿨다. 그러나 모두가 〈샤를리 에브도〉를 지지한 건 아니었다. 두려워 숨 죽이고 있었던 수많은 무슬림이 있었다. 사건 며칠 뒤부터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Je ne suis pas Charlie)’라는 반대 구호가 등장했다. 종교 모독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지지할 수는 없다는 거다.

유럽과 미국의 언론은 상반된 방침을 정했다. (2)를 표현의 자유로 보는 건 문화권이나 국가별로 달랐다는 뜻이다. 스위스 일간지 〈NZZ〉는 “당시 대다수의 유럽 언론이 그 논쟁적인 캐리커처를 가리지 않고 보도한 데 비해, 영어로 된 주요 언론은 가렸다”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 2015년 당시 편집국장은 “그런 종류의 유머는 불필요한 모욕이다. 우리의 독자는 IS 지지자가 아니라 브루클린에서 가족과 살아가는 독실한 신자”라고 말했다. 사건 직후 〈뉴욕타임스〉에 실린 한 칼럼 제목은 ‘나는 〈샤를리 에브도〉가 아니다(I am not Charlie Hebdo)’였다. 필자는 이렇게 썼다. “만약 그들이 그 풍자 주간지를 미국의 대학 중 한 곳에서 발행하려 했다면 30초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혐오 발언으로 그들을 고소했을 테니까.” CNN은 뉴스에서 해당 만화를 흐리게 처리했는데, ‘캐리커처 클로즈업을 피하라’는 내부 가이드라인이 있었다는 게 다른 미디어(〈폴리티코〉)를 통해 알려졌다.

(3)은 어떨까. 〈샤를리 에브도〉의 만화 재발행을 놓고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는 양심의 자유와 그에 따른 신성 모독의 자유가 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그 모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다.” 표현의 자유에 더 무게를 싣겠다는 뜻이다. 물론 이슬람권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최고 권위의 이슬람교 대변 기관인 이집트의 알아자르 대학은 만화가 재발행된 것이 “신자들을 도발한 혐오 발언”이라며 이를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스위스 방송사 SRF가 만화를 흐리게 처리한 것이 반발을 살 정도로, 유럽에선 (4) 역시 표현의 자유로 보는 쪽이 대세다. SRF는 이 일 이후 만화를 가리지 않고 내보냈고, 독일 등 유럽 다른 나라들도 재판 소식을 알리며 무함마드 캐리커처를 가감 없이 공개했다.

〈샤를리 에브도〉 논란과 ‘카산드라 케이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표현의 자유가 경계를 넘나드는 사건은 유럽에 흔하다. 스페인의 ‘카산드라 케이스’도 그중 하나다.

교사가 될 준비를 하던 스페인 여성 카산드라 베라 파스는 2016년 ‘도시치안보장기본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다. 2017년 스페인 법원은 카산드라에게 징역 1년에 7년간의 ‘완전한 자격 박탈(공무원이 될 수 없고, 장학금이나 정부 보조금 등 어떤 종류의 공공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을 선고했다. ‘범죄’는 카산드라가 2013년부터 2016년 사이에 올린 트윗 13개다.

도대체 어떤 트윗이기에 이런 형을 받는지 궁금하다면, 잠깐 스페인 역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73년 12월20일, 당시 스페인 수상이던 루이스 블랑코가 암살당했다. 암살 세력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 독립을 주장하는 국내 테러리스트 그룹 에타(ETA)였다. 에타 특공대원들이 블랑코가 다니던 성당 주변 도로 밑에 터널을 뚫고 폭약 80㎏을 채워넣은 뒤 그가 지나갈 때 터뜨렸다. 폭발 때문에 블랑코가 탄 자동차는 5층짜리 성당을 넘어 공중으로 20m 이상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블랑코가 스페인의 군사독재자 프랑코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비록 테러였지만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반겼다. 사망 관련 농담도 쏟아졌다. 스페인 북부 도시 빌바오에 있는 한 술집에선 가게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 “오늘은 레드 와인만 팝니다. 화이트(스페인어로 블랑코가 흰색이라는 뜻) 와인은 지붕 뚫고 나가버렸어요.”

1995년생 카산드라는 트윗에서 1973년 일어난 블랑코 암살을 희화화했다. 문제의 트윗 13개를 모아 재구성하면 이런 내용이다. ‘에타가 우주 영화를 제작했다. 제목은 ‘하늘 위로 세 걸음’. 스파이더맨 대 블랑코. 블랑코도 자기 차를 타고 미래로 날아갔나? 소련 대 스페인, 유리 가가린 대 블랑코. 당신과 함께 나는 날고 싶어, 하늘 위에서 당신을 볼 수 있게.’ 스페인의 도시치안보장기본법은 이 트윗들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 그리고 테러리즘에 대한 지지로 규정했다. 2015년 7월1일 발효된 이 법의 별명은 ‘재갈법’이다.

국선변호사가 배정됐지만 카산드라는 그를 해고했다. 카산드라가 트랜스젠더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변론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새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를 키워드로 삼았다. 이 사건은 결국 유죄판결이 났고, 사람들은 카산드라의 트윗을 ‘표현의 자유’ 해시태그와 함께 리트윗하며 항의했다. 진보정당들도 판결에 항의하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카산드라 편에 선 사람들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암살된 블랑코의 손녀 루시아 블랑코다. 그는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에 공개편지를 보내 사법부의 결정을 비판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살인을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건 역겹다. 나는 폭력에 반대한다. 에타뿐 아니라 오바마, 체 게바라, 누가 저지르건 관계없다. 살인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시민으로서, 또 살해당한 할아버지를 둔 손녀로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취향이 나쁘거나 센스가 부족한 것이 범죄로 간주되는 건 걱정스럽다. 난센스다. 카산드라가 희생자와 그 가족을 모욕해서 유죄라는데, 그의 트윗은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 슬프게 했을 뿐이다. 나는 우리가 관용과 존중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카산드라의 트윗이 ‘범죄’가 아니라 ‘나쁜 취향’일 뿐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 같은 구분은 유죄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히면서 힘을 얻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해당 트윗들이 희생자나 그 가족을 모욕했다고 볼 수 없다. 자동차가 높이 치솟은 걸 갖고 농담했을 뿐이다. 테러 공격은 44년 전 일이고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사회적·도덕적 관점에서 트윗을 비판할 순 있지만, 사법 시스템이 응답할 필요는 없다.”

ⓒAFP PHOTO1973년 12월 스페인의 블랑코 총리가 폭탄테러로 살해된 현장을 수색하는 경찰들.

한국의 여성 혐오 웹툰 문제도 마찬가지

위의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첫째, ‘표현의 자유’ 대 ‘혐오 표현’ 논쟁은 그 사회의 당면 이슈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무함마드 캐리커처가 테러로 연결된 배경엔 프랑스 사회에서 무슬림이 당하는 차별이 존재한다. 카산드라의 트윗이 문제 된 건 스페인 정부가 국내 독립 주의 세력을 심각한 정치적 위협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둘째, 표현의 자유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방패도, 창도 될 수 있는 기이한 도구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는 기자들이 소수자 무슬림을 상대로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다. 카산드라 사건에선 독립 주의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개인이 정부를 상대로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를 법으로 제한하는 게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정치 이슈를 법으로 못 박으려 들면 부작용이 생긴다. 창인 줄 알고 못 휘두르게 제한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던져버린 게 방패라면 어쩔 건가. 재갈을 물린다고 마음 속 혐오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상대의 의중을 모르고 있다가 역공격을 당하기 쉽다. 최근 한국에서 문제가 된 웹툰 작가 기안84의 여성 혐오 웹툰도 마찬가지다. 작가를 퇴출시키거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혐오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없앨 수 있을까. 그보다는 이 ‘나쁜 취향’의 만화를 통해 여성 혐오자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맞춤형 교육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표현의 자유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 놓여 있다.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숭고한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걷다 보면 어느새 혐오 표현이라는 반대쪽 면에 도착하게 된다. 표현의 자유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이 양면성을 잊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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