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 로컬리티 사업단몽골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오트라르 성터 유적지의 모습.

옛날 광고 카피에 이런 것이 있었어.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세계사에서는 누군가의 순간 선택이 100년을 좌우한 경우가 흔하고 그 이상으로 장구한 역사의 방향을 바꾼 경우도 드물지 않아.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을 거야. 누구나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때 그 문제집을 풀어봤다면” 등등 무의미한 공상을 하면서 살아간단 말이지. 하물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건 무의미할지언정 재미있는 작업일 거야. 그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바를 구분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면 의미까지 생겨날지도 모르겠구나. 오늘은 순간의 선택으로 자신과 나라를 말아먹은 것은 물론, 전 세계를 들쑤셔놓았던 한 군주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과거 중국과 그리스 로마 문화권을 이어주던 교역로를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 부른다. 이 이름을 붙인 건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야.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교역로가 주로 비단 거래를 통해 활성화됐다는 점에 착안해 이 이름을 붙였지. 비단길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여러 나라와 민족이 흥망을 거듭했고 이 교역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전쟁도 끊이지 않았단다. 13세기 초, 호라즘이라는 왕국이 이 지역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어. 오늘날 지도로 치면 이란과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땅을 합친 광활한 영토와 비단길의 풍요로움을 독차지한 나라였다. 호라즘의 왕 알라 웃딘 무하마드는 야심이 넘치는 인물이었어. 이슬람 세계의 구심점이라 할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쳐부수겠다며 바그다드로 원정을 나설 정도로 기세등등했지.

그러던 어느 날 무하마드에게 동쪽의 한 지배자로부터 전갈이 온다. 바로 몽골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이었지. 호라즘과 몽골 사이에 놓여 있던 ‘카라 키타이’라는 나라가 몽골에 의해 멸망한 뒤 호라즘과 몽골은 국경을 접하게 돼. 칭기즈칸은 당시 북중국의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서쪽으로 팽창하려는 욕심은 크게 가지지 않았던 것 같아. 칭기즈칸은 매우 우호적인 메시지를 보내지. “나는 해 뜨는 땅의 지배자이고 당신은 해 지는 땅의 통치자이니 우애롭게 지내보자(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어찌 보면 도발적일 수도 있는 표현이었어. 7세기 일본이 수나라 양제에게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보내노라”로 시작하는 국서를 보내 수양제를 울컥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또 달리 보면 그냥 세상을 반분해서 나눠 다스리자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어. 전갈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그대를 내 사랑하는 아들로 여기리라.” 칭기즈칸은 친밀감을 표현하고자 한 말이었겠지만 자신의 힘으로 나름 대제국을 건설한 무하마드는 이런 표현에 비위가 상했을 듯도 해.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면 오만은 성공의 자식이란다. 단기간에 성공한 사람은 결과에 도취돼 무리한 실수를 하기 쉬워. 무하마드가 그랬지. 그의 묵인이 있었던지 아니면 무하마드처럼 성공에 들뜬 영주의 헛발질인지는 모르나, 호라즘의 도시 오트라르의 영주 이날추크는 칭기즈칸이 보낸 친선 사절단 수백 명을 몰살시켜버린다. 이날추크는 그들이 스파이였다고 둘러댔지만 마땅한 변명이 아니었어. 죽은 사람 대부분이 호라즘인들처럼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었거든.

이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은 분노를 누르고 사신을 보낸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사절단을 죽인 이를 처벌하고 다시 사이좋게 지냅시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하마드가 직접 나섰어. 무슬림 사신은 죽여버리고 몽골인 사신은 수염을 태운 채 돌려보낸 거야. 최악의 모욕이었지. 분노한 칭기즈칸은 모자를 벗고 언덕에 올라 사흘 낮 사흘 밤을 하늘에 기도하고 군대를 일으켰어. 무하마드는 세계를 잿더미로 만들 불길에 기름을 부어버린 거야.

무하마드의 몇 가지 실수

빠르게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두 번째 실수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성공의 내실을 다지지 못한다는 데에 있단다. 호라즘은 급팽창한 대제국이었기에 내부 갈등이 심상치 않았어. 정복당한 사람들의 불만, 바그다드의 칼리프 등 기존 무슬림 세력의 반발, 무하마드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권력투쟁 등 불안 요소가 산재했다. 그 가운데 몽골과의 전쟁을 자초한 것은 발등에 도끼를 찍는 행위였지. 그래도 호라즘의 군대는 몽골의 두 배나 됐고 자기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으니 몽골군을 끌어들여 정면 격돌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어. 하지만 무하마드는 자신의 군대를 집결시키는 것을 두려워했어. 반대파가 그 군대를 장악한다면 왕은 죽은 목숨이 되니까. 여기서 어설프게 성공한 사람들의 세 번째 실수가 나온다. 그렇게도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사람들이 침울하고 소극적으로 변모하는 것.

바그다드부터 오늘날의 인도 인근까지 질풍같이 내달렸던 호라즘 왕 무하마드는 몽골군을 맞아 도시별로 농성전을 벌이라고 명령한다. 몽골군을 무찔러 내모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서 버티며 제풀에 물러서기를 바라는 전략이었지. 우리나라 역사상 전투 대부분이 농성전으로 전개된 것은 외적에 비해 병력과 물자가 열세였기 때문이야. 그런데 무하마드는 몽골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병력을 고립된 성벽 안으로 몰아넣었어. 몽골군은 호라즘 군대보다 적은 병력으로도 성을 포위할 수 있었고 각 성은 각개격파당하고 만다.

몽골 사절단이 죽임을 당했던 오트라르의 경우 다섯 달 동안 공방전을 벌이다가 함락됐는데 도시는 완전히 파괴돼 지금까지 불모지로 남아 있어. 성주 이날추크는 눈에 끓인 은물이 부어져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사마르칸트나 부하라 같은 대도시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사람 머리로 피라미드가 쌓였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우르겐치 같은 도시조차 칭기즈칸과 그 아들들이 총집결해 공세를 퍼부은 끝에 함락됐고 시민 전체가 학살되었지. 그래도 성에 안 찬 몽골인들은 강물을 끌어들여 도시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말았어.

훗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 웃딘이 옛 호라즘 땅에서 저항군을 일으켜 몽골군을 괴롭힌 역사로 볼 때 무하마드가 떨치고 일어나 병력을 모으고 몽골군에 맞섰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몰라. 그러나 무하마드는 패닉 상태에 빠져 도망만 쳤다. 실패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 없는 이가 제대로 된 한 방을 얻어맞았을 때 모든 판단력을 상실해버리고 천하의 못난이가 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지. 더구나 그 장본인이 호라즘 같은 대제국의 무하마드였다면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게 된다. 칭기즈칸은 심복 장군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무슨 수를 쓰든 무하마드를 잡아오라고 명령했고, 무하마드는 거지꼴로 도망 다니다가 카스피해의 섬에서 가련하게 죽었어.

무하마드를 생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일까.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몽골군이 일찍이 발을 들이지 않았던 카스피해 서쪽의 땅을 휩쓸어버린다. 이는 칭기즈칸의 후예들에 의해 감행되는 대규모 서방 원정의 전초전이 됐고, 동쪽 끝 고려에서 서쪽 끝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정복전쟁의 서막을 장식하게 돼. 이 무시무시한 역사의 문을 열어버린 이, 그 이름이 바로 호라즘 왕국의 왕 알라 웃딘 무하마드였다. 그가 조금만 신중했다면, 그가 약간 더 현명했다면, 그가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세계사를 아로새긴 역사의 흐름은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말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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