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스물다섯 살 이전에 들은 음악이 결국 평생 즐겨 듣는 음악이 된다.” 요는 젊을 때 귀에 꽂힌 음악이 그 사람의 음악적 취향을 좌우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독서도 그럴 것 같구나. 어릴 때 몸에 밴 문학적 ‘감수성’ 또한 그 후의 시간을 지배하는 느낌이거든. 아빠에게는 허버트 조지 웰스가 1898년에 쓴 소설 〈우주 전쟁〉이 그런 인상을 남긴 작품 중 하나다.
지구를 침공해 가공할 열선과 독가스로 세계 최강 영국을 유린해나가던 화성인들은 런던 함락 직전 몰살당한다. 그 위업을 달성한 건 박테리아, 즉 세균이었다(웰스 시대에는 인류가 세균보다 크기가 더 작은 바이러스를 알지 못했단다). 웰스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이 소유한 무기들은 모두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혜로우신 하느님이 지구에 내려준 하잘것없는 미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지.
웰스의 소설에서는 면역력을 지니지 못했던 탐욕스러운 외계 침략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지구 역사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적이 있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발견 후, 그곳에 거주하던 수천만 선주민(先住民)의 운명이 바로 그랬어. 그들은 오랜 기간 다른 대륙과 동떨어져 살았고 가축도 별로 기르지 않았기에 치명적인 감염병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 그에 대한 면역 또한 전혀 없었지. 지구에 온 화성인들처럼 말이야. 유럽인들은 그 병균을 잔뜩 보유하고 있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심연 속에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우주 전쟁〉 중).”
아메리카 선주민에게 재앙을 안겨준 병은 단연 천연두였어. 오늘날 멕시코에 자리 잡았던 아즈텍은 용맹하고 잔인한 정복 국가였다. 아즈텍의 전사들은 스페인 침략자들을 몰아냈지만 곧 전세는 역전된다. 전투 와중에 쓰러진 스페인인의 시신에서 나온 천연두균은 삽시간에 아즈텍 제국을 뒤덮어버렸지. 스페인인들을 축출했던 아즈텍 황제 퀴틀라와크부터 천연두로 목숨을 잃고, 아즈텍 인구 3명 중 1명이 천연두로 드러누웠어.
남아메리카의 잉카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잉카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우아나카팍 황제는 스페인 침략군이 오기 3년 전에 육로를 통해 전파된 천연두로 이미 사망했어. 10만여 명에 달하는 잉카인들도 스페인 군대보다 먼저 온 천연두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지. 천연두의 위력과 스페인 군대의 무력 앞에 잉카 제국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어. 천연두 탓에 신대륙 선주민들의 인구는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추산된다. “10~14일가량의 잠복기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건강한 피난민들도 증상을 보이기 전에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1530년대부터 천연두는 팜파스에서 오대호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뒤덮듯이 퍼지면서 유럽인 정복자들의 앞길을 터주었다(〈한겨레〉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2008년 2월23일).”
정복자들의 악행은 자신들에게 묻어온 천연두를 단순히 퍼트리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선주민들을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연두를 이용했지. 북아메리카 평원에도 수많은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어. 백인 정착민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점차 대서양 연안에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 서쪽으로 대륙 깊숙이 이동해나갔고, 선주민들과 충돌이 점점 빈번해졌지. 인디언들의 저항에 이를 갈던 영국 군인 제프리 애머스트(1717~1797)는 그 부하 부켓과 짜고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로 오염된 담요를 건네게 돼. 그는 “형편없는 종족을 싹 쓸어버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담요뿐 아니라 다른 모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라고 지껄일 정도였어. 자연의 공격으로, 또 이에 편승한 인간의 공작으로 천연두는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부를 참빗처럼 휩쓸었다.
양심과 탐욕의 합작, 노예무역
황금에 눈이 멀었던 유럽인들은 광산에서, 농장에서 인디언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부를 축적했다. 스페인인 사제 라스 카사스 등 일부 성직자들은 이 참상을 목격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권리를 존중할 것을 호소했다. 라스 카사스는 ‘바야돌리드 논쟁(1550)’에서 인디언들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설득과 교육으로 교화시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지. 라스 카사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어. “신께서 스페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인도에서 자행한 파괴 행위 때문이며, 스페인을 파괴하려는 하느님의 생각은 명백히 정당하고 그것은 40년이 지나면 분명해질 것이다.”
라스 카사스 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인디오를 노예로 부리는 일은 점차 줄어들게 돼. 하지만 반발도 심했지. 신대륙 스페인 지배자들의 분노가 커지자 이를 피해 신대륙을 떠났던 라스 카사스는 이후 영영 아메리카 대륙으로 돌아가지 못했어.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항상 대안을 찾기 마련이고, 대개 탐욕의 대안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질이 나쁘기 마련이야. 인디오 노예를 대신할 방안을 제시한 건 뜻밖에도 라스 카사스를 비롯한 ‘양심적인’ 사제들이었어.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건강한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라고 주장한 거야. 라스 카사스가 속한 도미니크 수도회도, 영화 〈미션〉에서 인디오들과 함께했던 사제들이 소속된 예수회도 흑인 노예 도입에 동의했다. 농장주들은 당연히 이 제안에 환호했지. 아마 “아멘! 믿습니다”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흑인 노예 무역이라는 세계사적 범죄는 그렇게 양심과 탐욕의 합작으로 열린 거란다.
아프리카에서는 대규모 노예사냥이 벌어졌고 대서양을 오가는 배에는 ‘검은 화물(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그득 실렸다. “4세기에 걸쳐 대서양 노예무역선에 강제로 태워진 1200만명 중 150만명이 항해 도중 숨졌다. 얼마나 많은 노예가 바다에 버려졌는지 노예선이 뜨기만 하면 상어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세계일보〉 2020년 7월8일).”
하지만 또 자연은 인간의 탐욕에 대해 무자비하게 복수하기를 즐긴다. 황열병은 본래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악명을 떨쳤던 풍토병으로 사하라 사막 등 자연적인 장벽에 막혀 유라시아 대륙을 넘보지 못했지. 이 황열병이 노예선에 실려 신대륙으로 옮아간 거야. 황열병을 옮기는 매개체는 아프리카의 열대 숲모기였어. 감염된 사람으로부터 피를 빨아먹은 모기가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방식이었지. 이 모기들은 습기가 가득한 노예선 안 어디에나 알을 까고 살면서 대서양을 횡단했단다. 인디오는 물론 백인들도 이 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고 신대륙에 상륙한 황열병은 과거 천연두의 기세를 잇는 새로운 사신(死神)으로 세계사를 황달빛으로 누렇게 물들이게 된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수백년 동안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황열병의 ‘세계화’였지.
역사를 곰곰 들여다보면 감염병이 그토록 큰 파괴력을 발휘했던 배경에는 인류의 탐욕과 혐오가 도사리고 있었어. 심지어 양심적인 사람들도 시대적 한계 속에서 죄악에 동참했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의 시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슬기롭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인류 앞에 무슨 구렁텅이가 기다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구나. 소설 속에서 웰스는 이렇게도 말한다. “인류는 수많은 죽음과 고통을 겪으면서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생존권을 획득했다. (···) 어떤 인간도 헛되이 살거나 죽지 않았다.” 지난겨울 시작된 코로나의 시대,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 전쟁〉의 웰스가 남긴 한마디는 울림이 크다. “우리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입니다.”
-
타이 왕가의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 외교’
타이 왕가의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 외교’
김형민(SBS Biz PD)
인삼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특산품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고려 인삼 맛을 보았다고 해. 동방의 먼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루이 14세에게 인삼을 바쳤거든. 그런...
-
만델라는 왜 저주해 마지않던 녹색 유니폼을 입었을까
만델라는 왜 저주해 마지않던 녹색 유니폼을 입었을까
김형민(SBS Biz PD)
얼마 전 미국에서 백인 경찰이 흑인의 목을 무릎으로 누른 끝에 절명시키는 사태가 일어나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인종차별 반대 시위로 들끓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할망정 최소한 ...
-
페스트 이후 건설된 거대 이슬람 제국
페스트 이후 건설된 거대 이슬람 제국
김형민(SBS Biz PD)
인류 역사상 수많은 감염병 유행이 있어왔지만 세계보건기구(WHO)가 수립된 이후 팬데믹이 선언된 것은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세 번째야. 1968년 홍콩에서 발병한 홍콩 독감(바이...
-
인간이 귀해지고 종교가 거듭나는 시간
인간이 귀해지고 종교가 거듭나는 시간
김형민(SBS Biz PD)
지난주에 얘기해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6세기 중반 발병 후 약 200년 동안 지역적인 유행을 되풀이하다가 8세기 중반, 즉 서기 750년의 유행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말이 20...
-
그 왕의 오만과 오판이 몽골제국을 역사에 새겼다
그 왕의 오만과 오판이 몽골제국을 역사에 새겼다
김형민(SBS Biz PD)
옛날 광고 카피에 이런 것이 있었어.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세계사에서는 누군가의 순간 선택이 100년을 좌우한 경우가 흔하고 그 이상으로 장구한 역사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