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밥〉 정연숙 글, 김동성 그림, 논장 펴냄

세상에는 예쁜 꽃이 참 많다. 예쁜 꽃 하나를 고르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가장 귀한 꽃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벼꽃이다. 〈꽃밥〉은 순희라 불리던 할머니의 일기를 통해 쌀과 살아온 시대를 그린다. 낟알이 조롱조롱 맺힌 푸른 면지를 넘기면, 할머니의 일기가 귀한 상차림처럼 한 장 한 장 펼쳐진다.

1964년 8월, 여름 햇살 뒤로 아이들은 메뚜기를 잡으려고 벼 사이를 뛰어다닌다. 순희는 이삭마다 핀 하얀 벼꽃을 보자, 갓 지은 쌀밥이 생각난다. ‘쌀 세 톨에 보리밥 한 톨’이라는 학교 구호가 있던 1970년대 시절을 지나, 순희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다. 순희의 어머니는 산모가 잘 먹어야 한다며, 미역국과 흰쌀밥을 지어준다. 꿀맛과도 같은 밥 한술을 뜨며 생각한다. 내가 먹는 밥이 어린 생명을 자라게 한다고.

순희는 아기의 이름을 벼의 꽃, 미화(米花)라고 짓는다. 쌀의 소중함을 익히 알고 있었던 순희에게 그 이름은 평생 품어온 이름이었을 거다. 순희가 엄마가 되고 미화가 자라 은진이를 낳으며, 생명이 삶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1990년대 수입 농산물 소비가 본격화하면서 농사로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과 귀농하는 2010년대 사람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변화 과정 또한 보여준다.

볍씨에서 싹이 나 모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의 배 속처럼 부드러운 흙이 볍씨를 자라게 해야 한다. 곧은 줄기를 가지려면, 호수와도 같은 논으로 옮겨져 씩씩하게 성장해야 한다. 뜨거운 여름, 작은 벼꽃은 낟알을 맺기 위한 산모의 고통처럼 피어난다. 꽃을 피우지 않은 낟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 이삭 하나하나마다 분명하고 맑은 꽃을 피워낸다. 낟알이 여물어갈수록 벼는 고개를 숙이고, 가을걷이를 마친 논은 모든 것을 비워내며 숙연한 자세로 겨울을 맞는다. 벼의 한살이는 우리의 생과도 참 많이 닮아 있다.

생명이 삶으로 이어지는 꽃

할머니의 일기는 2018년 10월을 끝으로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다음 해에 필 벼꽃을 손녀 은진이와 함께 볼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럼에도 쓸쓸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따뜻한 밥과 같은 온기가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하얗고 작은 꽃송이가 영글어 쌀이 되고, 쌀은 밥이 된다. 매일 먹는 밥이라서 밥에 대한 기억은 하나로 모을 수 없이 많다. 외할머니 집 대문을 열면 바다처럼 펼쳐져 있던 푸른 논, 이불 속에 넣어두었던 밥공기, 학교에 지각할까 봐 서두르는 내 입속에 넣어주었던 엄마의 투박한 김밥, 우리 아기가 처음으로 먹었던 흰 쌀죽.

시대가 바뀌어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건, 밥 앞에서 숟가락을 들고 밥 한술을 뜬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일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 고단함 때문에 밥 안에 핀 꽃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다. 오늘은 작고 하얀 꽃이 밥 위에 소복이 앉아 있는 상상을 보태며, 밥 한 공기를 야무지게 비워야겠다.

기자명 김지혜 (그림책 서점 ‘소소밀밀’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