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글쓰기를 하면서 나를 재정립해 나간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같은 기억도 다르게 소환된다. 때로는 과거의 나를 배반하기도 하면서, 여러 종류의 자아를 새로 발견하고 실험하듯 글을 쓴다. 내게 글쓰기는 곧 나의 가장 진실한 목소리를 지키는 일이다.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이미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보상이다. 칭찬받기 위해 쓰지 않는다.

그동안 페미니스트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자주 혼란을 겪었다. 여성의 목소리를 지키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고 느낀다. 자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는 두 가지의 커다란 장벽에 부딪힌다.

첫 번째는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책의 기나긴 역사를 통틀어 보았을 때 기록 대부분은 남성에 의해 쓰였다. 인류의 지적 유산이 남성을 위해, 남성에 의해 축적된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의 글쓰기, 혹은 페미니스트의 글쓰기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남성이 너무 쉽게 보편을 말한다. 서양, 백인, 남성,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경험을 쉽게 보편으로 확장해 써서는 안 된다. 여성의 글이 종종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은 보편(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어긋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벽을 넘어서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두 번째 장벽에 부딪힌다. 바로 페미니스트다운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는 남성 중심적인 글을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나를 지키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첫 번째 장벽보다 더 어렵고 복잡하다.

나는 한 명의 사람, 한 명의 시민, 한 명의 작가로서 존재하지 남성성의 대립항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로서 언제나 안전하게 정답으로 여겨지는 글을 선언하고 웅변하듯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순간에 자주 부딪힌다.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다고, 이것을 제발 보라고 분노하며 소리쳐야 하는 순간이 잦다. 그래서 페미니스트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는 나의 자아를 발견할 때에도, 그러한 자아를 감추고 억압하게 된다.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하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상처받은 것에 대해 항의하고 설교하며 비난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 복수하고자 하는 욕심, 세상을 어떤 고통이나 슬픔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그의 안에서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없는” 글을 훌륭하다고 보았다. 나 역시 분노가 시작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른 이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글을 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상대를 미워하기 쉬운, 납작한 존재로 바라보게 만든다. 또 스스로를 분노하는, 타인을 심판하는 주체로 설정하면 당연히 스스로에게도 가혹한 도덕적 무결함(이라기보다 사실 겉으로 내보이기에 완벽한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게 된다.

여성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남기 위해

결국 여성이 글을 쓸 때는 이중적인 억압이 발생한다.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부터의 억압,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로서 무결하게 써야 한다는 억압.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통과한 글만이 좋은 글은 아닐 것이다.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글이 좋은 글일 수 있다. 누구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지점에 발을 디디는, 그래서 반발하는 사람도 많은 글. 타인을 미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롭게 보게 하는 글. 읽는 이의 마음에서 자라나는, 그리하여 경계를 넘어가는 글.

이것은 무엇보다 여성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남기 위해 중요하다. 내게서, 또 다른 여성에게서 용납하기 어려운 여성의 이미지를 발견하더라도 조금은 관대했으면 좋겠다. 실수하고, 불순하고, 욕망하고, 완벽하지 않은 여성의 글쓰기가 쏟아질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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