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8월4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규모 폭발이 발생했다.

8월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폭발은 끔찍했다. 여느 폭탄 테러에서도 보기 힘든 버섯구름에 세계는 경악했다. 일단 우발적 사고로 보이지만 의아하기 짝이 없다. 위험물질 질산암모늄 2750t을 안전장치 없이 6년간 항만 창고에 방치했다. 항만 사무소가 관계 당국과 법원에 6차례나 위험물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반응은 없었다. 피해는 막대하다. 사상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극심해진 경제위기, 올해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이번 폭발 사건까지 겹치며 레바논은 총체적 난국이다. 폭발로 밀 보관창고가 날아가 식량위기도 가중될 전망이다.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총리를 포함해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책임지고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퇴임하는 장관들이 자기가 속했던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희한한 발언도 늘어놓고 있다. 피해 현장을 방문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마치 레바논 지도자 같다는 푸념도 들린다. 정부를 극도로 불신하는 대중은 거리에서 ‘차라리 마크롱이 나서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실패 국가(failed state)’의 징후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레바논 문제의 본질은 경제가 아니다. 정치의 실패다. 연원은 100년 전 오스만제국(오토만제국) 패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 오스만제국을 재편하며 신생국을 만들었다. 현대 중동의 시작이다. 영국은 요르단과 이라크 왕국의 수립을 주도했다. 혁명의 후예를 자임하는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 공화국의 탄생을 도왔다. 1926년 프랑스는 자국의 제3공화국 헌법을 본떠 레바논 헌법을 만드는 등 법과 행정 시스템을 정비하면서 레바논 건국을 준비해나갔다.

고민이 있었다. 레바논에는 종파가 너무 많았다. 본래 프랑스는 ‘마운트 레바논(레바논 중부 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레바논 건국을 추진했다. 레바논 남부와 북부엔 각각 드루즈파(이슬람 계열)와 마론파(기독교 계열)가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논의를 진행하며 레바논 국경의 범위가 넓어졌다. 베이루트를 포함한 북부 트리폴리, 시돈과 티르 등 지중해 해안 거점도시와 베카 계곡, 남부 리타니강 이남 지역까지 다 포함시켰다. 이른바 대(大)레바논, 현재 레바논의 영토다.

이로써 해안 및 남부에 살던 무슬림과 대도시의 기독교 소수 종파들까지 신생 레바논에 대거 편입됐다. 모두 18개 종파가 한데 묶이게 되었다. 당시 이슬람 수니파는 레바논 독립을 반대하며 끝까지 시리아로 통합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독립을 희구하던 레바논 정객들은 수니파를 설득했다. 결국 레바논 건국에 참여하는 모든 종파에게 일정한 권력을 붙박이로 보장해주었다. 각료직과 국회 의석수를 종파별로 고정하여 나누어 갖는 독특한 형태였다. 그래야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종파 대표들은 1932년 시행된 인구조사에 따라 권력 분점을 합의했다. 구체적 내용은 1943년 국민협약에 담겼다. 협약은 의회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마론파 기독교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국회 부의장과 외교장관은 그리스정교, 국방장관은 드루즈파가 맡도록 못을 박았다. 국회 의석수는 기독교와 이슬람을 6대 5의 비율로 고정했다. 이른바 신앙 정체성에 입각한 ‘종파주의’ 또는 종파 간 ‘연합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레바논식 민주주의다. 모자이크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국민협약은 단순히 권력구조만 다룬 것이 아니었다. 레바논의 국가 성격을 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동서 문명의 화합으로 상정했다. 이에 따라 1943년 의회민주주의 공화정 세속국가 레바논이 출범했다. 후견국을 자임한 프랑스도 고무되었다. 중동의 신생국 중에서 이렇게 종파 간 공존이 명문화된 나라는 없었다. 사람들은 레바논이 중동의 모델 국가가 될 것이라 상찬했다. 그러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내면의 골을 메우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구구성이 변했다. 기독교인이 줄고 무슬림, 특히 시아파 인구가 늘어났다. 국민협약에서 권력을 배분한 근거는 1932년 실시했던 공식 인구조사다. 당시 레바논 인구 104만8383명 중 기독교도가 61만2790명(그중 마론파가 35만1197명)이었다. 반면 무슬림은 43만5593명으로 조사되었는데, 그중 수니파가 19만5305명, 시아파 16만6536명, 드루즈 6만2084명 등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비율이 58.5%대 41.5%였던 것이다.

이후 공식 인구조사는 없었으나 추계에 따르면 1977년쯤엔 ‘기독교인 140만명 대 무슬림 170만’ 정도로 인구 역전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가운데서도 시아파가 대략 90만명에 이르게 되어, 마론파 기독교(80만명)와 수니파 무슬림(60만명)을 넘어서는 최대 다수 종파로 성장했다고 추측된다.

ⓒAFP PHOTO8월11일 폭발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종파 간 간극

시아파는 인구조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에 따라 기독교 마론파의 우위를 명시한 국민협약을 개정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요구는 타당했다. 하지만 레바논 출범 당시 합의했던 레바논의 대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국민협약의 본질은 분쟁을 막기 위해 종파별로 권력을 분점하되 특정 정파의 편파적 이익 추구를 막고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자는 데 있었다. 계약에 따라 다원적 정치체제의 균형과 질서 그리고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초월적 신앙고백에 근거한 종파 간의 간극은 컸다. ‘레바논’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종교는 오랜 세월 이어진 끈끈한 정체성이었다. 이 와중에 인구변화가 생겨나니 사달이 난 것이다. 문제의 근원은 더 심각한 데 있었다. 각 종파들이 해외의 자기 종파와 연대하게 되었다. 종파를 고리로 레바논 분쟁이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동 분쟁의 대표적 두 사안이 얽히며 레바논을 망가뜨렸다. 첫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레바논이 말려들면서 시작된 내전이다. 내전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베이루트를 초토화시켰다. 둘째는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의 공세적 개입과 헤즈볼라(레바논에 기반을 둔 이슬람 시아파 정치·군사 조직)의 문제다. 현재까지 레바논 정치 상황을 뒤흔들고 있다.

먼저 내전을 보자. 종파 균열이 서서히 불거지던 1970년대 초, 베이루트 외곽 난민촌에 자리 잡았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무장세력을 레바논 무슬림(특히 시아파)이 지원하면서 일이 꼬였다. 기독교 우파 세력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불러들였다. 결국 1975년 4월 베이루트 외곽에서 무장 충돌이 일어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물론 시리아까지 개입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들락날락하게 되었다. 시리아군은 레바논 전쟁 억지를 명분으로 2005년까지 29년간 주둔하며 주권국가 레바논을 마치 식민지처럼 다뤘다.

최악의 내전 상황은 1982년 이스라엘의 2차 침공과 맞물려 벌어졌다.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를 거쳐 베이루트까지 진격했다.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팔랑헤)와 함께 PLO의 거점을 파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론파인 바시르 제마엘 대통령 당선자가 피살되는 사건이 겹쳤다. 친이스라엘 대통령을 PLO가 사살했다는 오해는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의 보복 공격을 불렀다. 1982년 9월16일 저녁, 기독교 민병대는 베이루트를 장악한 이스라엘군의 묵인 및 공조하에 베이루트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급습했다. 이틀 동안 학살이 자행되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460명에서 3500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시아파 레바논인들이 살해당했다. 이른바 ‘사브라 샤틸라 사건’이다. 중동의 아랍인들이 이스라엘과 레바논 기독교도를 악마처럼 인식하게 된 계기다.

냉전이 끝날 무렵에야 내전도 종식되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연맹이 주도하고 미국이 후원한 타이프 협정이 체결된다. 종파 대표들은 다시 마주앉았다. 이슬람 측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기독교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각료회의의 권한을 높였다. 대통령의 총리지명권, 계엄선포권, 의회해산권을 폐지하면서 권력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국회는 기독교와 이슬람 6대 5 비율에서 5대 5 동수로 바뀌었다. 수니파 총리의 권한이 괄목할 만하게 커졌고, 국회의 위상도 높아졌다. 나름 인구변화에 조응하는 권력 재조정이었고, 대통령·총리·국회의장의 권한이 균형을 맞췄다. 혹자는 이를 ‘3인 대통령 체제’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권한의 균형은 곧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 행태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이란의 개입과 헤즈볼라 문제다. 1989년 타이프 협정은 종파 간의 갈등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결국 헤즈볼라가 떠올랐다. 사실 종파 간 갈등이 극심하던 내전 중반기인 1983년부터 헤즈볼라는 힘을 드러냈다. 사브라 샤틸라 사건 이후 PLO가 약화되고 이스라엘도 레바논에서 발을 뺐다. 레바논은 내부 종파의 갈등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즈음에 ‘혁명 이란’의 후원으로 등장한 강력한 시아파 정당이 바로 헤즈볼라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 시아파 집권을 추구하는 공식 정당이지만 동시에 무장 세력이기도 하다. 1983년부터 헤즈볼라는 중동 현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행위자다.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대사관과 미군 해병대 주둔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2005년 2월 라피크 하리리 총리 폭살 사건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테러와 연루되었다고 줄곧 의심받아왔다.

내전의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 1992년부터 고강도 경기부양책을 쓰며 레바논의 환골탈태를 꿈꿨던 하리리 총리의 피살은 레바논을 뒤흔들었다. 2000년 선거에서 총리로 복귀한 하리리는 시리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마침 미국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시리아가 적성국가로 분류되던 시기였다. 수니파의 대표였던 하리리는 기독교권 및 드루즈파를 설득해 ‘반(反)시리아-반(反)시아파’ 연대를 구축하려 했다. 물론 미국은 하리리를 지원했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소행이라고 알려진 테러로 하리리가 허망하게 숨지자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반(反)헤즈볼라-반(反)시리아’ 시위대가 베이루트 순교광장을 가득 채웠다. 그 규모가 무려 100만명을 웃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시리아는 국제사회의 압박에 못 이겨 철군을 선언했다. 헤즈볼라도 레바논 정치에서 힘을 잃는 듯 보였다. 수니파와 기독교파는 이제야 비로소 레바논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7월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무력 충돌로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뒤바뀌었다. 이스라엘은 33일간 시아파 거점인 남부 레바논과 남베이루트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지지했다. 헤즈볼라라는 위험 세력을 제거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의 버티기는 끈질겼다. 결국 레바논 민간인의 피해가 크게 늘어나면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교전은 중단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헤즈볼라 제거 목표는 무위로 돌아갔다. 다시 부상한 헤즈볼라는 ‘기독교와 수니파의 친미·친서방 기조는 이스라엘 편들기’라고 질타하며 여론 반전을 주도했다. 기독교와 수니파의 협공에 위협을 느끼던 온건 시아파 세력들도 헤즈볼라와 함께했다. 시아파 각료들은 내각에서 전원 사퇴했다. 시아파 국회의장인 나비 베리는 일체의 회의 소집을 거부하며 정국을 마비시켰다.

이후 아랍의 봄, 시아파 벨트(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의 헤즈볼라) 형성, 내전, IS(이슬람국가: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테러단체) 등장 등 일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헤즈볼라는 견고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밖으로는 이란과 연대하여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등에 개입하면서 투쟁력을 키웠다. 국내에서는 통치 역량을 학습했다. 현 미셸 아운 대통령은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친서방 성향의 수니파보다는 친헤즈볼라 성향을 보이는 등 시아파의 영향력이 높아진 상황이다. 그러나 어느 종파도 레바논 전체를 아우르며 국가 공권력과 행정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헤즈볼라는 자신의 거점인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 남부 등 일부 지역에서 자기들만의 나라를 운용하는 듯했다. 그나마 헤즈볼라는 병원, 학교, 복지 시스템 등을 갖춰 시아파들에게 배타적으로 제공했지만 다른 종파는 그 정도도 해내지 못했다. 이번 항만 폭발 사건은 레바논이 국가 전체 시스템 문제를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 난맥상은 이토록 오래 묵은 레바논 정치의 모순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합리적인 정치체제라고 믿어졌던 레바논의 추락은 종파 사이의 벽 때문이다. 종파적 정체성에 함몰되어 국민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1943년 국민협약의 정신은 단순히 싸움을 회피하기 위해 권력을 나눈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 분점을 통해 공존과 대화를 이끌어내어 종국에는 유기적 결합에 이르고자 했다. 그러나 목표를 상실하면서 레바논은 정상적인 국가 건설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어떤 제도가 레바논을 구할까

더 큰 비극은 종파 분열을 틈타 국제정치가 국내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레바논 내 종파 간 대화보다 외국 동일 종파와의 연대가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하며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중동의 대표적 두 문제인 ‘이팔(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이란 주도의 시아파 네트워크’가 레바논 내부로 틈입해 나라를 뒤흔들었다. 레바논은 이팔 분쟁이 폭발하는 장소이자 중동 시아파들이 연대하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항만 폭발 사건 이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지도자들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내각은 총사퇴했고 전문가들은 레바논의 미래에 관해 분석과 전망을 내놓는다.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 바꾸는 게 답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근본을 바꾸어야 한다.”

종파 간 권력 분점 시스템을 해체하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타당하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뿌리내린 종파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수렴시킬 수 있는 제도가 있을까?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즉 국민과 정치인들이 기독교, 수니, 시아를 내려놓고 레바논의 대의를 잡아채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제도가 레바논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in@mof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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