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의 〈성처녀와 배〉. 예수가 원죄(배)를 먹어 없애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는 해석이 많다.

성경은 중세 미술의 단골 소재였다. 특히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그린 작품이 무수히 많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성처녀와 배(Vergine della Pera)〉 (1526년) 역시 그중 하나다. 그림 속 ‘성처녀’는 성모 마리아, 아이는 예수를 가리킨다. 메디치 가문 소장품이었던 이 그림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그림에서 마리아의 손에 배가 들려 있다. 배는 인간의 원죄를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가 원죄를 (먹어) 없애서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는 ‘그림 해석’이 많다.

그런데 ‘저 과일이 정말 서양배인지’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다. 이탈리아 산세폴크로 출신 농업사학자 이자벨라 달라 라지오네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소작농과 지주가 50대 50으로 수확물을 나누며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농부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했고, 농토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러자 라지오네는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논밭을 찾아 가꿨다. 유전학을 세부 전공으로 삼아 지역 농민의 지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 12세기부터 지역에서 심어온 작물이 무엇인지 상당수 밝혀냈다. 20여 년 전 일이다.

농업사를 연구하던 라지오네가 그림에서 힌트를 얻은 순간이 있다. 16세기에 지은 궁전 팔라초 부팔리니에서 사용한 식자재와 당시 요리법에 대한 문헌을 조사하던 때다. 서류에서 눈을 떼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본 그녀는, 궁전의 프레스코화에서 농작물의 역사를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팔라초 부팔리니의 프레스코화를 그린 화가 크리스토파노 게라르디는 그림에 하얀 오이와 수수를 넣었는데, 현대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에서는 극히 드문 작물이었다. 게라르디는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과일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것으로 유명했고, 라지오네는 16세기 움브리아 지방에 이런 작물이 흔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지오네는 그림·문헌과 구전하는 이야기를 교차 검증했다. 그의 연구 결과,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에서 마리아가 들고 있던 ‘배’는 사실 사과의 한 종류(mouth of ox)였음이 밝혀졌다. 라지오네는 몇 년 전 이탈리아 페루자의 버려진 농토에서 이 사과를 발견했다. 현재 자신의 농장에서 같은 품종을 키우고 있다.

미술사학자와 농업사학자의 해석 차이

베를린 주립미술관(Staatliche Museen zu Berlin)에 걸려 있는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의 〈마리아와 아이(Maria mit dem Kinde)〉(1455년)를 두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과일은 이전까지 ‘납작한’ 사과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라지오네의 연구 결과, 이 과일은 사과가 아니라 녹색 배(Pera Verdacchia)였던 것이다. 그는 이 과일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발견해 자신의 농장에 심어놓았다.

라지오네는 여러 품종을 발견했다. 지금은 농장에서 600여 그루를 키우고 있는데, 그 수요가 꽤 되는 모양이다.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까지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현재 자기 웹사이트를 통해 분양을 진행 중이다.

물론 모든 미술사학자가 라지오네의 과일 연구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주장을 무시하기도 한다. 뜻을 같이하는 일부 학자들은 라지오네와 함께 책을 펴내기로 했다.

기자명 위민복 (외교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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