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PHOTO2020년 2월4일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의사당에서 열린 신년 국정연설에 앞서 닐 고서치 대법관(왼쪽)과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브렛 캐버노 대법관. 두 대법관은 트럼프가 취임 후 지명했다.

“연방 대법원이 절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죠?” 미국 내 불법체류자 자녀들에 대한 추방유예 제도를 폐지해달라는 소송을 연방 대법원이 6월 중순 기각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반응이다. 그는 대통령 면책특권을 이유로 끈질기게 거부해온 자신의 납세 내역을 공개하라는 최근 연방 대법원 판결을 두고도 ‘정치적 기소’라며 맹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보수적 판사 두 명을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미국 사회를 보수 이념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연방 대법원을 ‘장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큰 그림’은 최근 연방 대법원이 잇따라 진보 성향 판결을 내리면서 좌초되고 말았다.

트럼프가 대법관으로 임명한 보수 성향 판사는 닐 고서치와 브렛 캐버노다. 이로써 연방 대법원의 이념 성향은 ‘보수 5명 대 진보 4명’으로 재편되었다. 트럼프는 지난달 오클라호마주 툴사에서 연 대규모 집회에서 보수 유권자층을 겨냥해 “연방 대법원에 고서치와 캐버노라는 위대한 대법관이 있다. 두 분은 위대하다!”라며 찬사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의 두 판사는 트럼프가 그토록 꺼려하던 납세 내역 공개 판결에서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진보 판사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시대에 연방 대법원이 행정부와 동일한 권한을 가진 사법기관으로서의 독립성을 선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방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고무도장’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연방 대법원은 지난 6월 한 달 동안에도 미국 사회의 중대 현안인 낙태, 동성애, 불법체류자 자녀 문제 등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놓았다. 6월15일 연방 대법원은 직장에서 동성애자 혹은 성전환자라는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차별에 해당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는 보수계인 로버츠 대법원장과 고서치 대법관이 진보 판사 쪽에 합류했다. 사흘 뒤 연방 대법원은 미국 내 불법체류자의 자녀들이 31세가 될 때까지 미국에서 머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제도(DACA)’를 폐지해선 안 된다고 찬성 5, 반대 4로 판결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판사 4명과 손을 잡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에서 채택한 이 제도 덕분에 약 65만명에 달하는 불법체류자 자녀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취업할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연방 대법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무산된 것이다.

이어 6월29일에도 연방 대법원은 낙태 진료소 및 낙태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 수를 제한한 루이지애나주의 낙태의료시설법이 위헌이라며 진보 진영의 손을 들어줬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판사들 곁에 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방 대법원은 2016년에도 텍사스주에서 채택한 비슷한 낙태제한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미국에서 낙태 문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소송에서 연방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판결을 내린 뒤 역대 보수 행정부에서 이를 뒤집으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이처럼 로버츠 대법원장이 캐스팅보트 노릇을 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를 연이어 꺾고 있다. 그 덕분에 로버츠 대법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싸우는 굳건한 버팀목’이란 평가를 받는다. 노아 펠드먼 하버드 대학 법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서 “존 마셜 연방 대법원장 이후 자기 목소리를 낸 가장 강력한 대법원장”이라고 평가했다.

로버츠 대법원장(65)은 2005년 9월 연방 대법관이 되었다. 그를 지명한 사람은 공화당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었다.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법률고문, 연방 법무부 수석 부차관, 연방 순회고등법원 판사 등을 두루 거친 미국의 대표적 보수 판사다. 특히 그는 낙태 등 중대한 사회 현안에 대해선 연방 대법원의 기존 판례를 존중하는 ‘선례 구속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2012년 ‘오바마 케어(미국 전 국민의 건강보험 가입 의무화)’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진보 판사들의 ‘합헌’ 의견에 동조했다. 이로써 ‘보수 성향 대법원장’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단번에 깨버렸다. 그는 지난해에도 진보 판사 대열에 합류해 ‘2020 인구 총조사’ 설문조항에 미국 시민권 보유 여부를 묻는 질문을 추가하려던 트럼프 행정부의 계획을 좌절시킨 바 있다.

ⓒAP Photo국정연설에 참석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 2005년 조지 W. 부시가 지명한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나 최근 연방 대법원에서 캐스팅보트 구실을 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를 연이어 꺾고 있다.

트럼프 재선되면 대법원은 ‘이념적 대결장’

흥미로운 사실은 2017년 1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보수 판사가 수적으로 우위를 점한 연방 대법원이 동성애, 이민, 낙태, 대통령 행정명령 등의 판결에서 진보 쪽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는 새뮤얼 엘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을 제외하고, 로버츠 대법원장은 물론 고서치, 캐버노 대법관은 최근 핵심 사안의 판결에서 드러났듯 보수와 진보 성향을 오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화자찬하는 ‘연방 대법원의 보수화’가 무색한 지경이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일부 이슬람 나라 출신의 미국 입국을 금지한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위헌 소송이 줄을 이었다. 당시에는 연방 대법원이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낙태와 오바마 케어 등 중대한 현안에서 다른 누구보다 로버츠 대법원장의 ‘반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11월3일의 대선을 앞두고 ‘연방 대법원 장악’을 다시 주요 의제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 지지 기반인 ‘기독교 보수파’를 잡기 위해서다.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임기 4년 동안 80대 고령의 진보 성향 판사 2명이 은퇴할 가능성이 있다. 그 후임으로 극우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다면 낙태, 동성애, 이민 같은 이슈에서 보수층이 반길 만한 제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우 성향의 대법관 지명은 인준권을 가진 상원의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닥칠 게 뻔하다. 정치권에 이어 대법원까지 ‘이념적 대결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로버츠 대법원장 역시 연방 대법원의 정치화를 공공연히 반대해온 인물이다. 2018년 11월 연방 지방법원 판사가 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중남미 난민의 망명 신청을 불허한 행정부 결정을 번복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해당 판사를 가리켜 ‘오바마 판사’라고 공격한 바 있다. 당시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통해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도, 트럼프 판사도 없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오로지 독립적인 사법부다”라고 일갈했다. 워싱턴의 이름난 연방 대법원 소송 전문인 리사 블랫 변호사는 〈워싱턴포스트〉에 “로버츠 대법원장 치하의 대법원은, 대법관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일반의 기대를 깨고 사사건건 트럼프 행정부와 의회에 맞서왔다. 현행 대법원이 비로소 사법부 독립의 원칙을 되찾은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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