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2019년 8월5일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홍콩 시위대가 벽돌을 던지며 저항하고 있다.

홍콩 항쟁이 촉발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기나긴 터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가 영국·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반응에 압박감을 느끼고 국가안전법(홍콩 국가보안법)을 최종 성안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하지만 시진핑 중국 주석이 자신의 지위와 국내 안정을 위태롭게 할 선택(국가안전법 포기)을 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공산당은 빼든 칼을 도로 집어넣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한편으로는 강력한 탄압으로 홍콩 민주화 운동의 소멸을 기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완취(大灣區:중국 정부가 본토의 광둥성 9개 도시와 홍콩, 마카오를 연결해서 조성하겠다는 광역경제권) 개발을 통한 이익이라는 당근을 꺼내 흔들고 있다. 경기침체의 벼랑에 선 홍콩 시민들을 달래려는 셈법이다.

최근 렁춘잉 전 행정장관 등 친중파 엘리트들은 ‘홍콩재출발 대연맹(香港再出發大聯盟)’이라는 관변 조직을 발족하고, 경제 부흥의 길에 앞장서겠노라 나서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의 방향에 부응하는 것이다. 홍콩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해온 부동산 재벌과 정치 엘리트들은 철저한 동원 부대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남은 변수는 1년간 이 항쟁에 가담해온 수많은 민주파 활동가와 시민들이다. 이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분화하고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홍콩의 희미한 미래도 점칠 수 있다.

초기 홍콩 항쟁은 “지도부 없는 운동(leaderless resistance)”으로 불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운동에 참여한 모든 시민을 아우르는 지도부는 없다. 하지만 2016~2017년 한국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 운동을 촉발시키고 주도하려 시도한 집단은 있다. 바로 민주 진영 50여 개 단체가 연합한 ‘민간인권진선(民間人權陣線)’이다. 홍콩 반환 전후 보통선거 캠페인과 1989년 톈안먼 항쟁 연대 시위(5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톈안먼에서 울린 함성에 호응했다)를 기제로 형성된 이들은 민주파 정치세력과 시민단체 등을 아우른다.

ⓒEPA민주파 정치인 마틴 리(왼쪽)와 〈빈과일보〉 사주 지미 라이(오른쪽)가 5월18일 치안법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무런 지분이 없다”

지난 연말 홍콩 현지에서 만난 민간인권진선 부의장 에릭 라이는 “2020년 9월에 있을 입법회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라고 말했다. 올해 들어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었다가 잠잠해진 지난 4월 갑작스러운 해일이 몰아쳤다. 홍콩 경찰이 마틴 리, 앨버트 호 등 대표적인 민주파 정치인과 활동가 15인을 전격 체포한 것이다. 지난해 8월 불법 시위를 주최했다는 혐의지만, 하나같이 입법회 선거 준비 과정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인물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표면상으로 운동을 이끌되, 항쟁에 참여하는 모두를 정서적으로 지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운동세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점유한 집단은 대학생이다. 친중파로부터 “폐청(廢青)” “폭도” 등으로 비난받는 홍콩의 대학생들은 항쟁 초기부터 떼를 지어 시위에 참가해왔다. 지난해 6월부터 11월 말까지 6개월간 학생회는 단연 이 운동의 주역이었다. 대규모로 집회에 참여했고, 학교별 행동을 주도했다. 지난해 11월 초 홍콩 과기대학 2학년 차우츠록이 경찰에 쫓겨 달아나다 추락해 사망하자,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학생들은 캠퍼스에 진입하려는 경찰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특히 홍콩 이공대학에서 벌어진 2주간의 봉쇄와 목숨을 건 저항은 수천 명의 체포자로 이어졌다. 1년간 체포된 8000여 명 가운데 무려 40%가 학생이다.

당시 홍콩 이공대학 캠퍼스에는 “우리는 이 도시에 아무런 지분이 없다”라는 낙서가 적혀 있었는데, 이는 학생들의 분노가 정치적 쟁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드러낸다. 오늘날 홍콩의 청년들은 취업난과 저임금 노동시장, 부동산 버블의 삼중고에 고통받고 있다.

10대 청소년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지난해 9월이다. 청소년들은 개학과 함께 스스로 동맹휴업을 조직했다. 아침엔 등굣길 침묵시위로, 강당 안에선 시위 구호 제창으로 저항했다. 이런 청소년들이 학교를 벗어나 마주한 거리는 전쟁터였다. 열일곱 살 청소년이 경찰이 쏜 총에 맞기도 했다. 체포된 시위대 중 가장 어린 연령은 11세였다. 시위 초기 부모들의 통제로 거리에 나서지 않던 청소년들은 이제 주저 없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친중 상점과 지하철역 입구에 불을 지른다.

이처럼 폭력투쟁 노선을 밟는 이들을 ‘용무파’라 일컫는다. 항쟁 초기 온몸을 검은 옷과 고글로 무장하고, 시위 대형의 맨 앞에 서는 청년들을 지칭했던 용어다. 최근엔 용무파와 ‘독립파’의 노선이 비슷해지고 있다. 독립파는 홍콩 내의 민주선거 도입을 넘어 ‘독립’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다. 중국 정부의 탄압이 강화될수록 이들 집단이 갖는 정치적 비전도 좁은 길로 향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조직된 운동의 경계 밖에 존재하고, 소규모로만 움직이며, ‘LIHKG 토론구’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익명으로 의견을 개진한다. 익명의 기획으로 지하철역 입구에 불을 지르거나 도로를 막는다. 이런 행위가 도시를 멈추고 ‘비상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란(馬蘭)’이란 닉네임의 한 좌파 청년은 이들을 일컬어 “분노와 초조함만으로 가득한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용무파와 독립파의 그늘은 짙다. 운동에 참여할 폭을 좁힐 뿐 아니라, 우익 포퓰리즘을 강화한다. 가령 40만명에 달하는 동남아 출신 가사노동자나, 대륙 출신 농민공들은 홍콩 사회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인데도, 이들의 시야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홍콩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 주체는 ‘홍콩 민족’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점증하는 반중 정서가 역으로 ‘홍콩 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한 것이다. ‘적의 적은 동지’일까? 이들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홍콩 항쟁을 구원해줄 협력 상대로 기대하기도 한다. 미·중 간의 이원적 구도를 국제질서의 전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 식민지 시절이나 금융허브 도시에 대한 찬가도 아니고 중국 체제로의 인입도 아니며 본토주의도 아닌, ‘대안 홍콩’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여기는 좌파들이 있다. 좌파들은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도모하고, 노동조합 가입 캠페인에 집중하며, 우익 포퓰리즘으로 경도하는 ‘독립파’를 강하게 비판한다. 최근에는 미국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 운동과의 연대도 시도하고 있다. 진보정당인 사회민주연선(社會民主連線)과 좌파 활동가 그룹 라우산 등은 “BLM과 홍콩 항쟁이 만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홍콩 항쟁에 ‘노동자’ 참여가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5일 파업이다. 홍콩의 민주노총 격인 직공맹(職工盟)은 이날 동시다발 파업을 성공적으로 조직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 달간 치밀하게 준비해 이뤄진 이날 파업은 홍콩 항쟁 내 ‘왼쪽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던 민주파 내의 좌파들에게 청신호였다. 이들은 도시를 멈추게 하기 위한 합법적 방법을 찾던 시민들과 조우했다. 텔레그램에서 자율적으로 직업별 모임을 만들던 노조 추진 모임들이 직공맹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연극계와 마케터·예술인·사회복지사·호텔리어 등 다양한 직군의 시민들이 스스로 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우산운동 때는 보이지 않던 흐름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일터에서 파업을 조직할 것인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텔레그램과 거리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노조는 30개 이상으로 확대됐다.

향후 전망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직공맹 리척얀 사무총장은 당장 국가안전법이 시행된 후 고난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타국 노조들에 지지를 구할 경우 ‘외국의 간섭을 부추겼다’는 혐의가 적용될 수 있겠죠. 법이 다루는 범위가 워낙 넓으니까요.” 그의 말처럼 앞으로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언제 기소되어 대륙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한국 노동자와 시민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홍콩은 지금도 전쟁 중이다. 거리에선 여전히 체포 행렬과 그들에 대한 기소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경찰 폭력에 대한 객관적 조사는 이뤄지지 않는다. 최근 ‘경찰감사를 위한 독립감찰위원회(IPCC)’가 경찰 폭력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민주파 중 어떤 사람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조사에 대해 국제사면위원회 홍콩 지부는 “경찰의 총체적 위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규명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EPA톈안먼 시위 30주년인 6월4일 학생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수치의 기둥’을 닦고 있다.

시민 200만명,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올해 1월 의학 전문지 〈랜싯〉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2014년 우산운동과 2019년 항쟁 이후 홍콩 시민들의 우울증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 연구는, 홍콩 인구 700만명 중 240만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200만명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에 걸린 것으로 추산했다. 또한 이런 수준의 집단적 발병은 대형 참사나 무장 충돌, 테러를 겪은 뒤에나 나타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정세가 격변하는 오늘날 홍콩은 한반도의 운명과도 무관하지 않다. 깊은 좌절과 분노에 잠긴 홍콩 시민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경제 증진과 정치 봉쇄(經濟拔高, 政治圍堵)’라는 통치 방침을 홍콩에도 적용하고 있다. 대륙에서 먹혔으니 홍콩에서도 먹힐 것이라고 중국 고위층은 판단한다. 하지만 민주파 일각은 그런 방책이 오늘날 홍콩의 모순을 더욱 증폭시키리라고 본다. 현상에 대한 처방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자유롭고 평등한 도시라는, 영국 식민지 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반환 이후에도 없었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홍콩인들의 불안과 분노를 극복하게 해줄 유일한 길이다.

기자명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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