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1979년 12월18일 오전 10시 육군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10·26 사건 결심공판이 열렸다. 이날 김재규, 김계원 등 7명에 대해 사형이 구형되었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

1979년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10·26 사건 재판 당시 변론을 맡은 안동일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1979년 12월의 1심 4차 공판부터 김재규·박흥주·이기주·김태원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을 맡았다. 안 변호사는 국선이었다.

원래 이 재판엔 사선변호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재규 피고인 등에 대한 1심 재판 과정에서 ‘민주 회복’이라는 10·26 거사의 동기를 부각시키며 맹렬히 재판에 임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합수부장)이 이끌던 보안사령부(보안사)는 김재규 피고인의 가족을 회유·협박해서 30여 명에 이르던 사선변호인들을 사임시키고 만다. 이어 보안사 측이 주선한 국선변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 안동일 변호사였다.

신군부는 국선변호사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고분고분 따르리라 기대했을 터이다. 완전히 오산이었다. 당시 안동일 변호사는 재판 과정의 불공정성을 조목조목 따지며 열성적으로 변호했다. 격노한 보안사에서 안 변호사를 불러 협박하기도 했다. 그것도 재판정 부근에서.

“재판정 뒷문을 통해 바로 붙어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보안사 요원 10여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그곳은 하루 종일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보안사 측이) 원하는 방향대로 쪽지에 적어서 판사와 검사에게 보내는 장소였다. 내가 들어가자 가운데 버티고 앉아 있던 보안사 남 아무개 장군이 ‘국선변호사가 눈치 없이 뭘 그리 열심히 재판하느냐. 너 손 좀 봐줘야겠다’고 강압적으로 호통쳤다.”

안동일 변호사는 남 장군의 지시로 서빙고 분실까지 끌려갈 뻔했다. 마침 현장에 있던 손 아무개 판사(당시 합수부에 파견)의 기지로 간신히 험한 꼴을 면했다.

“손 판사가 남 장군에게 ‘10·26 재판정에 외신기자들도 많이 와 있는데, 국선변호사라도 변론을 열심히 해야 외부에 공정한 재판으로 알려지는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해서 화를 면했다.”

피고인 측은 재판 과정을 녹음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신군부의 입맛대로 움직이던 재판부는 이를 불허했다. 변호인들이 공공연히 법정에서 유린당하는 ‘재판 아닌 개판’의 기억을 깡그리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남았다. 당시 쪽지 재판을 끌어가던 보안사 측이 재판 전 과정을 빠짐없이 몰래 녹음해두었다. 물론 불법행위였다. 이 보안사의 ‘불법행위 장물’이 40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최근 JTBC가 보안사 관계자로부터 입수해 5월2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공개했다. 김재규 재판 1, 2심 과정을 녹음한 테이프 53개 분량이다. 이 테이프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재판 진행 내용, 쟁점 사항, 김재규 피고인의 진술 등이 소상히 들어 있다. 10·26 사건 재판정에서 신군부가 자행한 쪽지 재판 개입 등 사법부에 치욕을 안긴 불법행위까지 엿볼 수 있다.

이 자료가 등장함에 따라 신군부의 불법 개입으로 인한 ‘개판’을 ‘재판’으로 바로잡겠다는 뒤늦은 움직임이 시작됐다. 사건 주역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40여 년이 흐른 2020년 5월26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유족과 변호인단이 재심 청구서를 서울중앙지법에 접수했다. 청구인 대표는 김재규 전 부장의 셋째 여동생 김정숙씨(82)다(“적어도 전두환이 말한 것은 거짓이다” 인터뷰 기사 참조).

김재규 재심청구 변호인단은 10·26 사건 재판 당시 변론을 담당했던 강신옥 변호사, 민변 소속 이상희·이영기·조영선 변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민변 소속 세 변호사는,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무수하게 인권을 유린했던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해서 위헌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다. 강신옥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재심청구의 소회를 밝혔다. “김재규 장군이 전두환에게 얼토당토않은 파렴치범으로 몰려 사형당한 지 40년 만이다. 다행히 이 사건 재판의 전모를 담은 녹음테이프가 나와서 이제라도 재심을 청구하게 돼 감개무량하다.”

ⓒ시사IN 신선영5월26일 오전 민변 사무실에서 ‘10·26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재심청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 전 부장의 죄목이 ‘내란 목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언론도 신군부의 입맛대로 김재규를 인격적으로 죽이는 방향으로 보도했다. 내란 목적이 의미하는 바는, 김 전 부장이 대통령 자리를 빼앗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 변호사는 “재심을 거쳐 최소한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으로 (김재규의) 죄목만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사살했다. 이 사건 뒤 가장 바쁘게 움직인 인물은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었다. 김재규 부장은 거사 다섯 시간 만인 27일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각에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박정희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사람 중 하나인 전두환은 보안사로 하여금 김재규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하나회 소속 정치군인들을 소집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전두환은 자신에게 법적 수사 권한이 없는데도 계엄 상황을 핑계로 합수부장 자리를 꿰찼다. 이어서 김재규 재판을, 무주공산이 된 권력 장악의 발판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 부장과 일행(박흥주·박선호·유성옥·김태원·이기주)은 합수부 수사와 군검찰을 거쳐 한 달 만인 1979년 11월26일 군법회의에 공소 제기되었다. 이후 김재규 등 10·26 관련자에 대한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같은 해 12월4일 시작된 1심 공판이 15일째인 12월18일 끝났다. 그로부터 이틀 만에 선고공판이 결행되었다. 김재규는 물론 박흥주·박선호·이기주·유성옥·김태원 등 10·26에 가담한 중앙정보부 요원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내란목적 살인죄와 내란미수죄가 적용됐다.

2심은 1심보다 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항소이유서가 제출되기도 전에 공판기일을 잡았다. 이 재판은 1980년 1월22~24일 사흘간 열렸다. 이어 불과 나흘 만인 1월28일 항소심에서도 전원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1, 2심의 재판정은 삼엄한 분위기였다. 이번에 공개된 보안사의 재판 과정 녹음 파일에는, 변호인단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폭행과 능욕, 심지어 살해 위협 사례까지 등장한다. 박흥주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던 태윤기 변호사는 공판기일 때 재판부에 이렇게 호소했다.

“M16 소총을 멘 군인들이 경계하는 삼엄한 군법회의에서 계속 쪽지가 날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기피사유서를 제출하다가 헌병으로부터 뒷덜미가 잡히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법조 생활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변호인을 맡는 데 대해 경찰관으로부터 방해를 받았고, 집으로 조직적인 협박 전화와 역적 재판을 한다며 살해하겠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공판 도중 쪽지 재판에 개입하는 보안사 요원들의 육성도 그대로 담겨 있다.

검찰관:피고인께서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일행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죠?

김재규:5·16 이후에 또 한 차례 혁명이 있었습니다.

재판장:자랑입니까 지금? 법정을 충고하는 겁니까?

(이어서 보안사의 ‘쪽지방’에서 나오는 목소리)쪽지방:(김재규가) 영웅이네, 영웅. 나중에 휴정할 때나 하지 지금은 건드릴 수가 없어, 지금은.

김재규 등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이 ‘국가 기밀’이라며 저지되는 경우도 있었다. 갑자기 비공개 재판으로 이어진다.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10·26 재판의 공판조서가 김재규 등 피고인들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축소·조작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예컨대 김재규는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를 살해한 취지를 다음처럼 일관되게 밝힌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신체제의 완화를 건의하다가 벽에 부닥쳐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캄보디아 킬링필드 같은 국민 대량학살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전두환 합수부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10·26의 동기를 끼워 맞춘다.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해임될 위기에 처함(해임설)’ ‘차지철 경호실장과 빚은 갈등’, 심지어 ‘박정희를 살해한 뒤 김재규 본인이 대통령에 오르겠다는 패륜적 발상’ 등을 박정희 살해 동기로 밀어붙인다.

그러나 녹음테이프에 기록된 실제 재판의 정황을 보면 합수부 측이 제시한 동기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테이프를 들어보면, ‘해임설’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 박정희 최측근이던 김계원 비서실장의 재판정 진술에 따르면,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갈등 때문에 10·26이 발생했다는 주장도 신빙성이 없다. 또한 김재규 본인은 스스로에 대해 ‘대통령 되겠다고 대통령 무덤 위에 올라갈 정도로 타락한 인물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부인한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권총을 겨누던 순간을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김계원을 팔로 치며)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친구’.”

그러나 합수부가 적시한 범죄사실에는 교묘하게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이 삭제되어 있다. 10·26 거사 동기가 ‘대국적 정치’ ‘민주주의 회복’ 등이었다는 김재규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가려버린 것이다.

10·26 재판은 사법부 치욕의 역사

신군부가 사법부에 안긴 치욕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은 1980년 3월 대법원 형사 3부(재판장 안병수, 주심 유태흥·양병호·서윤홍 대법원 판사)로 배당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12·12 쿠데타(1979년)로 권력을 장악한 뒤 10·26 재판 1, 2심에서 김재규 등에 대한 ‘내란죄 사형선고’를 얻어낸 상태였다. 신군부는 대법원에도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서둘러 끝낼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 판사 4명이 심리하는 상고심 재판에서 양병호·서윤홍 두 대법관이 1, 2심에서 적용한 ‘내란목적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로 인해 사건은 대법관 15명이 참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넘어갔다(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 주심 유태흥 대법원 판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판사 6명(양병호·민문기·임항준·김윤행·서윤홍·정태원)이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냈다. 나머지 판사 8명(이영섭·주재황·한환진·안병수·이일규·나길조·김영철·유태흥)은 상고 이유가 없다며 2심 재판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다수결에 따라 항소심 판결대로 김재규 등에 대해 내란죄 사형이 확정됐다.

당시 보안사는 10·26 사건이 ‘내란목적 살인’이 아니라 ‘단순 살인’에 해당한다고 소수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에 대해 철저히 보복을 가했다. 5명은 판결로부터 석 달도 지나지 않은 1980년 8월9일, 보안사의 압력으로 모두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나머지 한 사람인 정태원 대법관도 이듬해 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에 대해 양병호 대법관(2005년 작고)은 생전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980년 1월 말 보안사 2인자라는 사람이 찾아와 ‘김재규 내란음모 사건이 대법원으로 넘어오면 상고 기각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뒤 나는 소수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돼 1층 밀폐된 공간에서 3일간 감금당한 채 사표를 내도록 강요받았다. 퇴임 후에도 보안사가 3년 동안 변호사 개업을 못하게 방해했다.”

당시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낸 대법관 6명이 신군부의 미움을 사게 될 판단을 내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현행법상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두 가지 명백한 증거가 필요하다. 형법 제87조가 규정한 ‘국토를 참절한 죄’와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참절(僭竊)은, ‘국가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점거하여 그 국가의 주권 행사를 사실상 배제하고 국가의 존립, 안전을 침해하는 일’을 의미한다.

ⓒ연합뉴스1996년 12월16일 오전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및 5·18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 등으로 각각 무기징역과 17년 징역이 선고되었다. 10·26과 5·18 당시 신군부는 김재규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참절과 폭동의 좋은 사례는 따로 있다. 김재규 재판이 한창이던 1979년 12월12일,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대를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너 폭력적으로 입법·사법·행정부를 장악했다. 명백한 헌법 유린행위다. 1995년 5·18 특별법이 제정된 뒤 재판정에 선 전두환·노태우에게 뒤늦게나마 내란죄가 확정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97년 최종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 형을 선고받은 두 사람은 기본적인 경호 외에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모두 박탈당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처럼 내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김재규를 내란죄로 단죄했다. 반드시 역사의 매듭이 풀려야 할, 적반하장인 셈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재규뿐 아니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내란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훗날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판사 6명은 김재규의 10·26 사건에서 이 같은 내란죄의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8대 6’의 팽팽한 의견 대립 끝에 김재규 등을 합수부 입맛에 맞는 ‘내란목적 살인’으로 판결했다. 그러나 변호인들조차 판결문을 열람할 수 없었다. 언론 역시 전두환 신군부의 보도금지 지침에 따라 대법원의 소수의견을 보도하지 못했다. 결국 김재규 부장이 시종일관 주장한 10·26 거사 동기는 은폐되고 만다.

결국 10·26 재판은 1, 2, 3심을 통틀어 사법부의 또 다른 치욕의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안사에 의해 불법 녹음되고, 보안사 요원들에게 쪽지 전달을 받아 진행된 재판, 소수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6명 대법관에게 고문과 강제퇴직을 시킨 전두환 신군부의 악행은 ‘사법부 독립의 흑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보안사의 재판 녹음테이프에는 김재규가 거사 직전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박흥주 당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에게 한 말이 나온다. “김 부장님이 귓속말로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속삭였다(박흥주의 법정 진술).” 40년 만에 찾아온 10·26 사건의 역사적인 재심 앞에 2020년 사법부가 무엇으로 답할지 주목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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