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랍게〉는 김순악씨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2020년 한국 사회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까지일까. 해방 이후 50년을 침묵하며 살아왔고, 1990년대 이후 30년을 ‘당사자 운동가’로 싸워왔다. 그중 어떤 면모는 ‘피해자다움’으로 부각되었고, 또 어떤 면모는 성스럽게 포장되었다. 일면만 알던 우리에게 “김학순이 시작했고, 이용수가 마무리하겠다”라는 이용수씨의 발언(5월25일 기자회견)은 그래서 낯설고 갑작스럽다. ‘위안부’ 피해자·생존자·운동가로서 지난 30년은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피해자로서 허다히 위안부라고 했습니다마는 저는 아직 위안부라는 소리가 참 듣기 싫습니다. 저는 엄연히 이용수입니다… 왜 여러분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불쌍히 보여야 하고, 또 빼앗긴 청춘을 애달프게 찾아달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큐멘터리 〈에움길〉(2019)은 20년 전 이용수씨의 발언을 담아낸다. 피해자성에 크게 기댄 ‘위안부’ 운동의 한계를 이용수씨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해왔다.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논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놓쳐온 ‘퍼즐 조각’을 찾아 모아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은 아래 다큐멘터리 네 편은 이용수씨가 던진 질문을 풀어나갈 기록들이다. 개봉 시기는 제각각이나, 아래 순서대로 관람을 권한다.

〈보드랍게〉(박문칠, 2020)/ 73분

“위안부는 입 밖으로 내지도 않고 내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었지. (TV로 ‘위안부’ 피해자 얘기를 보고) 내 속이 헤까닥 뒤집어지는기라. 나도 옛날에 저랬는데(김순악).”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삐뚤빼뚤 써 내려가는 동안 이름 열여덟 개가 차례로 불린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사케, 위안부, 기생, 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 할매, 순악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씨(2010년 작고)가 82년 일생에 걸쳐 불렸던 이름들이다. 다큐멘터리 〈보드랍게〉의 첫 장면은 여성 활동가들이 김순악씨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시작한다.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상영된 이 작품은 ‘위안부’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입을 통해 김순악씨의 일대기를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지난 6월1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보드랍게〉가 초점을 맞추는 건 위안소에서 겪은 성폭력 피해가 아니라, 해방 이후의 삶이다. “배린 몸띠(버린 몸뚱이)”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김순악씨는 유곽으로, 미군 기지촌으로 전전하다 남의 집에 얹혀살며 식모살이를 한다. 유곽과 기지촌에서 생긴 두 아들을 홀로 키웠다. ‘보드랍게’라는 영화 제목은 김순악씨가 해방 이후 오랜 세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관련이 있다. “아가씨나, 머시매나, 얼래나… 내 이야기 해가지고 ‘어이구 그랬구나!’ ‘하이고 참 애뭇다(애먹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김순악씨가 마음의 병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보드랍게〉는 ‘소녀’와 ‘할머니’ 사이 누락되었던 생애사를 복구하며 전시 성폭력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촘촘히 드러낸다.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다룬 여성주의적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성 활동가들이 김순악씨가 생전에 남긴 증언을 낭독하는 구성을 취했다. 불렸던 이름만큼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일대기를 읽으며 활동가들은 “나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하기도 하고, 각자가 겪은 ‘미투’ 고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보드랍게〉는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의 경험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당사자 없는 ‘위안부’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다큐멘터리가 내놓은 하나의 답변일지도 모른다.

〈낮은 목소리 3부작〉은 1990년대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한 피해자들의 증언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낮은 목소리 3부작〉(변영주, 1995~1999)/ 각 93분, 90분, 77분

“일본 정부가 잘못했으면 정부가 확실하게 교과서에 가르치고 추모비도 세우고 (해야지). 우리는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바라는 거지 위로금을 바라는 게 아니야(김순덕).”

2018년 변영주 감독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던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눔의집에 갔다가 할머니들이 되게 역정을 내셨어요. 영화 만드는 애가 또 우리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온 거냐 하고.” 감독은 1993년부터 7년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후원 시설인 나눔의집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1부에서 3부로 갈수록 피해자에서 적극적인 운동가로 변모해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인다. 1부에서는 “넘 챙피하기도 하고, 우리 어마니도 모르는데(강덕경씨)”라며 인터뷰에 난색을 표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임종까지 찍어달라”(강덕경씨, 낮은 목소리 2부 〈낮은 목소리-일상적인 슬픔〉의 주인공)고 요구하거나, 직접 인터뷰어로 나선다. 3부 〈낮은 목소리-숨결〉에선 감독 대신 이용수씨가 중심이 되어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을 인터뷰한다.

다큐멘터리는 1990년대,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한 ‘위안부’ 피해 증언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1부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은 1993년 12월23일 제100차 수요시위에서 시작한다. 국내 ‘위안부’ 운동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렇게 시위를 계속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뿌리를 뽑아야제” 하고 외치는 30년 전 할머니들의 모습이 지금보다 젊고 활기차 낯설기도 하다. 수요시위 제1442차(2020년 6월3일)를 맞은 현재 시점에서 되짚어본다면, 남아 있는 ‘위안부’ 생존자들이 지난 30년간 짊어졌을 부담과 고민이 새로 읽힌다.

〈에움길〉은 지난 20년간 나눔의집과 ‘위안부’ 운동 역사를 되돌아본다.

〈에움길〉(이승현, 2019)/ 76분

“열네 살짜리보고 하루에 군인 40명, 50명을 받으란다. 어떻게 살겠니(이옥선).”

‘10대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갔다’는 증언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개개인이 그려온 삶의 궤적은 달랐다. 〈에움길〉은 나눔의집에서 농사를 짓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비춘다. 박옥선씨는 “노래를 못하지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배춘희씨(2014년 작고)는 “일본말도 잘하고, 중국말도 잘하는 총명한 할머니”다. 이용수씨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말 잘하는, 말 잘하는” 할머니였다. 결코 단편적이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 개개인들의 면모가, 주인공 이옥선씨(93)가 풀어낸 말들 속에 있다.

〈낮은 목소리〉가 나눔의집에서 남긴 20세기 기록이라면, 〈에움길〉은 지난 20년간 나눔의집과 ‘위안부’ 운동 역사를 되돌아본다. ‘위안부’ 생존자 이옥선씨가 주인공이자 내레이터다. 2003년 8월 청와대 앞 ‘집단 국적 포기’ 시위 당시 경찰과 대치하며 고함을 치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2019년 이옥선씨의 느릿느릿한 음성과 대비된다. “나는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살았어. 지금 내가 하는 거는 죽은 사람들의 일을 다 하는 거야.” 한국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동안 이옥선씨가 수요시위에서, 나눔의집 앞에서, 일본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위안부’ 경험을 증언하고 또 증언했던 이유다. “우리가 부끄러울 일이 있는가, 일본이 부끄럽지”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만, 그 사람들(일본)도 자기 역사인가 알 수 있다”라는 이옥선씨의 말이 2020년 이용수씨의 언어와도 그리 다르지 않다.

〈어폴로지〉는 길원옥씨의 투쟁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어폴로지〉(티파니 슝, 2016)/ 106분

“너무 오랜 세월을 두고 해결이 안 되니까, 저렇게 입 딱 다물고 앉았으니까 답답하거든요. 이렇게 먼 길을 온 건 여러분들의 도움을 얻고 싶어서 왔습니다(길원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씨(한국), 차오 씨(중국), 아델린 씨(필리핀) 세 사람의 삶을 풀어낸 다큐멘터리다. 캐나다 출신 티파니 슝 감독이 6년에 걸쳐 3개국을 오가며 할머니들의 현재 삶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평생을 가족에게 ‘위안부’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한 아델린 씨에겐 후회가 가득하다. “심장 깊이 박힌 가시를 뽑아내고 싶어. 너무 오래 참아왔어.” 그렇게 가족에게 터놓기 시작한 차오 씨와 아델린 씨의 경험은, 길원옥씨가 겪은 경험과도 이어진다. 한·일 양국 간 민족주의적인 관점만으로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이해할 수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을 〈어폴로지〉는 넌지시 말한다.

동시에 〈어폴로지〉는 길원옥씨의 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2013년 5월 일본 오사카 시장이 ‘위안부 필요했다’라는 망언을 했을 때, 길씨는 일본 오사카 시청 앞에서 “우리 문제가 해결돼야 전쟁이 끝난다”라고 말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500만명 세계인의 서명을 유엔 인권이사회에 직접 전달했다. 카메라는 고통 속에 숨죽여 사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닌, 강인하고 독립적인 운동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전쟁이 무엇인지, 남자가 무엇인지. 나를 뺏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내게 돌아온 것은 구타와 고문과 감금이었습니다. 열세 살 어린 나이로 견디기 너무 힘들어 엄마 엄마 소리쳤습니다.” 1시간4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속에서 길원옥씨는 비슷한 증언을 반복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을 할 때마다 매번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어폴로지〉는 지난 30년간 축적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더 이상 당사자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고통과 상처의 언어들은 이미 충분하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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