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5월27일 제1441차 정기 수요시위. 나눔의집 할머니 한 분이 별세하면서 명복을 비는 의자가 놓였다.

“그녀는 담요를 개켜 한쪽으로 치우고 손으로 방바닥을 쓴다. 먼지와 실오라기, 살비듬, 은빛 머리카락들을 손바닥 아래로 모아 뭉치던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김숨의 소설 〈한 명〉(현대문학, 2016)은 생존자가 단 한 명뿐인 미래를 시점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형태지만 316개에 달하는 각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말’에 근거한다. 한때 숨겨야만 했던 과거가 활자화되어 하얀 종이 위에 널릴 때, 그것을 읽는 사람들 역시 도망칠 수 없는 ‘목격자’가 되고 만다.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남지 않는 시기가 언젠가 온다고 해도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작도 한 명이었다. 1990년 1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라는 글을 4회에 걸쳐 발표했다. 그는 식민 지배가 끝난 후 드러난 피해자 가운데 자기 또래 여성의 흔적이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의아했다고 한다. 1980년 윤 전 교수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씨를 일본 오키나와에서 직접 만났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일본은 물론 중국과 타이 등지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관련 증언을 수집했다.

국내에도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분명 있으리라 짐작됐다. 그해 11월16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만들었다. 1991년 8월14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김학순씨(1997년 작고)가 정대협을 통해 공개 증언에 나섰다. 해방된 지 46년 만에 도착한 이야기였다. 지금보다도 가부장적이고 이른바 ‘순결’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었던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일대 사건이었다.

김학순씨를 시작으로 ‘한 명’은 더 이상 한 명이 아니게 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말과 살아 있는 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증거’였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어쩌면 바꿀 수 있었다. 운동은 그 믿음과 변화를 동력으로 30년을 이어왔다. 정대협은 최근 논란에 휩싸인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전신이다.

정부는 1930~1945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피해자를 약 8만~20만명으로 추정한다. 이 중 약 2만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정부 등록 피해자는 불과 240명이다. 여전히 더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 없이’ 살아 있거나, ‘이름 없이’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2016년과 2018년 신규 등록한 피해자를 포함해 6월4일 현재 생존자는 17명이다. 평균연령은 91세. ‘시간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다. 피해 당사자 없이 운동을 이어가야 할 시기가 머지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전략과 방향이 논의되어야 할 때였다.

그 방향성에 대한 토론이 다소 느닷없이, 논란의 얼굴을 한 채 시작되었다. 지난 5월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중 한 명인 이용수씨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용수씨는 정의연 후원금 사용처 및 수요집회 등 기존 운동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5월25일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정의연이 피해자들을 이용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이어갔다.

이용수씨는 2015년 〈미래한국〉과 인터뷰하면서도 비슷한 내용의 발언을 했지만, 이번과는 사회적 반응이 사뭇 달랐다. 칼끝은 자연스럽게 비례대표 국회의원인 윤미향씨(더불어민주당)에게로 향했다. 정대협 간사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시작한 윤씨는 정의연 대표와 이사장을 맡아왔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연합뉴스지난해 6월19일 제2회 김복동 평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윤미향 당시 정대협 상임대표, 길원옥씨, 수상자인 바스피예 크라스니치-굿맨, 이용수씨.

한국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인 국회의원 자리와 연결된 만큼 사안은 폭발성을 지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법안이 올라올 때마다 발목을 잡았던 미래통합당은 이번 논란을 해결하겠다며 위안부할머니피해진상규명 TF까지 구성했다. 때마침 정의연과 별개로 불교계가 설립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거주 시설인 나눔의집도 비리 의혹에 휩싸였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 자체의 정당성과 도덕성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연일 정의연 회계 부정과 운동 방식을 놓고 보도와 정쟁이 이어졌다. 사태 초반 자신의 처지를 ‘조국 사태’에 빗댄 윤미향씨나, 정의연을 비판하는 이용수씨의 발언 의도나 배후를 각자 나름대로 해석하는 여러 말들이 보태지면서 논란은 덩치를 키웠다. 한편으로는 정의연 후원 철회가 빗발쳤다. 한때 시민사회에선 ‘입금은 최고의 연대’라는 말이 깃발처럼 사용되었다. 후원 철회는 일종의 단죄였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이미 피해 당사자 없이 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령과 노환 등을 이유로 2018년 11월께부터 당사자들이 수요집회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일종의 ‘노선 차이’로 정의연과 거리를 두고 있던 이용수씨가 ‘이제 나밖에 없다’라는 절박함으로 다른 목소리를 낸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시민사회 내에서도 사실상 ‘윤미향 1인 체제’처럼 굴러가는 정의연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운동의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다음 세대 활동가를 키워낼 필요가 있었다. 한 연구자는 ‘포스트 윤미향’의 자리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로 윤미향씨의 국회 진출이 논의된 측면도 있다고 봤다.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를 넘어

어떤 단체든 이견과 갈등은 숙명이다. 하지만 ‘생존자’의 목소리는 단순히 한 명의 ‘이견’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논의는 편을 나눠 공회전을 반복했다. 두 번째 기자회견 이틀 뒤인 5월27일 이용수씨는 대구 중구 2·28민주화운동기념공원 내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잠시 참석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할 말 다 했다. 그 말만 믿으세요. 같이 우리 투쟁합시다”라는 말을 남겼다. 6월1일에는 김학순씨가 묻힌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과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을 잇따라 방문했다. 이 운동의 ‘정당성’이 당사자인 자신에게 있음을 웅변하는 행보였다.

윤미향씨와 이용수씨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적이기보다 동지였다. 이용수씨는 수요집회라는 운동 방식에 날을 세우긴 했지만 이 운동을 그저 외면할 수도 없는 책임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수요집회 참가자들을 ‘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로, 이 모든 논란을 ‘내가 나서 수습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였다. 운동의 시작이 김학순이었다면 그 끝은 자신일 터였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윤미향이든 이용수든 어느 한 명이 끌어안고 결자해지할 수 있는 차원을 이미 넘어서 있다.

ⓒ시사IN 이명익윤미향 당선자가 5월29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연 관련 의혹을 해명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 운동이 곧 ‘증인’을 늘려가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윤미향씨는 이용수씨의 증언을 들은 첫 사람이었다. 정의연은 그 말의 확성기 구실을 했다. 말이 말다운 말이 되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이 필요하다. 듣는 일은, 듣는 사람의 적극적 해석과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말을 처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준 정의연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또 다른 당사자이기도 하다. 정의연을 당사자의 한 축으로 두지 않으면 피해 당사자가 모두 숨진 뒤 이 운동은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와 정의연의 활동은 전후 피해자 문제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얼룩진 폭력의 역사에서 건져 올린 목소리는 개인의 불행으로 요약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였다. 이를 전쟁 성범죄로 규정하고 일본의 책임을 묻는 정의연의 활동은 한·일 관계를 넘어 여성인권 전반에 대해 질문하는 일로 넓어졌다. 나아가 전 세계의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피해 당사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자신의 경험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다양한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손잡고 보폭을 넓혀갔다. ‘민족 대 민족’의 구도를 넘어선 활동은 정의연의 핵심 활동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피해자나 ‘할머니’를 넘어 여성인권 운동가로 자리매김해나갔다. 한국 정부가 관리했던 주한미군 기지촌 피해 여성들과 초기부터 연대해왔던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애초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오른 것도 여성단체들이 이른바 ‘기생관광’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부터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어색하지 않은 연대였다. 수요집회가 1442차(6월3일 기준)까지 이어지는 동안 주최는 정의연이었지만 수많은 여성단체들이 연대의 의미로 집회를 주관해왔다.

201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길원옥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나비기금은 대표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 활동이었다. 모인 돈은 멀리는 콩고로, 가까이는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무엇보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의 가해국이기도 했다.

2015년 김복동씨(2019년 작고)는 나비기금 3주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으로 인해서 베트남의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까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힘으로 나비기금을 모아서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용수씨 역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피해 여성들에게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라고 격려하며 ‘연대’를 약속하기도 했다(〈25년간의 수요일〉, 사이행성, 2016).

하지만 정의연의 활동에서 가장 도드라지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주장이 일본의 사죄와 배상 요구였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는 여성인권 문제일 뿐 아니라 한·일 외교와 정치까지 한데 얽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피해 양상과 삶이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만큼 ‘무엇이 진정한 해결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해결 방법을 둘러싸고 다양한 수위의 협상과 타협이 이뤄졌다. 일본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시행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을 수령했거나 2015년 12월2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당시 ‘보상금’을 받은 이들 역시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보상(적법한 행위라도 손해를 물어주는)이 아닌 배상(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를 물어주는)을 요구하는 ‘강경 노선’을 채택해온 정의연은 협상 국면마다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는 정의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운동의 여러 순간마다 ‘비빌 언덕’이었다. 정의연이 해왔던 전 세계 전쟁성범죄 피해자 지원,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 등 다양한 사업과 성과는 때로 그 그림자에 가려지곤 했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는 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 ‘개인’들을 소외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닌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문화연구자 엄기호씨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2018)에서 한국 사회가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통을 당하고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만 겨우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를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로만 재현하는 일은 “그에게서 말도, 삶도 모두 박탈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서 보려 했던 모습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월27일 기자회견에서 이용수씨는 “위안부는 더러운 이름이다. 위안부 누명을 벗고 싶다”라며 절규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생존자로 존재했고 앞장서 당사자 운동을 해온 그가 여전히 피해자에 ‘갇혀 있는’ 모습은 향후 이 운동이, 또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로 남았다.

물론 활동가들 역시 이 지점에서 윤리적 고민을 거듭해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해결하고 강조하기 위해 매번 증언하게 하는 일은 ‘곁’에 선 사람들 역시 괴로운 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2019)에서 안선미 전 정의연 국제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또 했던 말을 또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아픈 기억을 끊임없이 계속 되새김질을 해야 하는 거고. 그리고 그 얘기를 다 하고 나서 이제 군중들이 사라진 후에는 다시 또 혼자 남아서 내 삶을 쓸쓸하게 돌아봐야 하고.”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에 기댄다고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민족주의라는 맥락이 없다면 그 비극적 사건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윤명숙 박사(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조사팀장)는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이학사, 2015)에서 군위안소 문제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을 짚는다. “군위안소 문제는 식민지 또는 점령지라는 특이 상황 아래 전개되었던 민족 차별이라는 사실이 있다. 조선인 군위안부 징모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용이한 일이었다.”

이 복잡다단한 문제는 명칭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용수씨는 기자회견에서 “왜 정신대 문제를 위안부 운동과 섞어서 이용했느냐”라고 비판했다. ‘정신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국민을 동원한 일제의 인력동원 정책을 의미하는 말이다. ‘위안부’라는 말이 일본군 문서에 등장한 시기는 1939년으로, 일제의 강제징용 정책 중 일본군의 성노예 제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실제 피해 사례를 수집해보니 ‘정신대’와 ‘위안부’가 구분되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여성에게는 강제동원된 노역의 종류가 성별을 이유로 ‘하나 더’ 많았을 뿐이다. 모두가 전쟁범죄의 피해자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젠더 폭력에 대한 척박한 인식 탓에 ‘위안부’가 아닌 ‘정신대’를 앞세워 운동이 진행된 점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맥락을 놓치기 쉽다.

학문적 연구는 뒷받침 안 된 현실

명칭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시기는 1993년 10월 ‘강제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였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위안부’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되, 가해자의 언어인 만큼 작은따옴표(‘’)를 반드시 붙여서 사용하고 범죄 주체인 일본군을 그 앞에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윤미향씨는 〈25년간의 수요일〉에서 “명칭은 지금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몇몇 생존자들은 여전히 이 이름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중략) 일본군의 만행을 잘 드러내면서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이름은 계속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라며 독자에게도 고민해줄 것을 당부한다.

다시, 사람은 사라져도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록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일본군‘위안부’연구회 회장)는 ‘기본’을 다시 짚자고 제안한다. “슬로건 위주의 운동이 아니라 관련 기록과 연구를 체계화하고 정비할 필요가 있다. 할 게 너무 많다. 이런 기본이 제대로 돼 있지 않으니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도 미진할 수밖에 없다.”

ⓒ연합뉴스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걸린 배지와 문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학문적 연구가 체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부 중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연구소 설립을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 항목)로 삼았고, 이는 2018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개소로 이어졌지만 지원은 미비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 연구소는 불안정한 운영을 지속 중이다.

연구자들은 1년 단위 계약을 갱신해야 하고, 예산은 9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국내외 주요 기록물의 체계적 발굴 및 데이터베이스화, 보존 가치 높은 자료를 국가기록물로 지정, 역사교육 추진 기반 마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 기록집의 외국어 번역 및 발간 등 어느 하나 쉽지 않은 과제임에도 독자적인 사업을 지속성 있게 추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연구소의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도 발목을 잡는다. 남인순 의원(더불어민주당)이 20대 국회에서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가 문을 닫으며 함께 묻혔다. 정부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폐기하고 그 결과물인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지만, 후속 조치는 보이지 않는다.

기존 운동의 성과를 존중하되 실패한 자리를 돌아보고 앞으로를 모색하는 일은 특정 단체만의 몫이 될 수 없다. 사회문제에 대한 정답은 함께 써 내려가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고 있는 우리 역시 이 역사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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