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시엘라 이투르비데의 작품 ‘우리의 이구아나 여성(Nuestra Señora de las Iguanas)’.

팬덤은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현상을 일컫는다. 팬덤이라는 단어는 광신자를 뜻하는 퍼내틱(fanatic)의 팬(fan)과 영지(領地)·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이다(〈두산백과〉). 퍼내틱은 라틴어 파나티쿠스(fanaticus)에서 유래한 말로,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후에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몰입해 그 속에 빠져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에도 팬덤이 존재할까?

팬덤은 어떤 대중적인 특정 인물이나 분야에 지나치게 편향된 사람들을 하나의 큰 틀로 묶어서 정의한 개념이다. 텔레비전 보급과 더불어 대중문화가 확산되면서 나타난 현상의 하나로, 팬덤이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팬덤 문화라는 말도 생겼다. 이런 이유로 팬덤이라는 말에서 연예인에게 열정을 드러내는 ‘팬클럽’을 연상할 수 있다.

사진에도 팬덤이 존재할까? 텔레비전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일부 인물 사진가나 패션 사진가 몇몇이 떠오르지만 다큐멘터리나 예술 사진 분야에서도 팬덤이 존재하는지는 미지수다.

해외는 다르다. 특히 멕시코 사진은 우리에게 많이 생소하다. 우리가 아는 작가도 많지 않을뿐더러 작품 성향도 서구 사진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마누엘 알바레즈 브라보와 그 제자인 그라시엘라 이투르비데 정도. 멕시코에서 이투르비데는 ‘국민 사진가’다. 그녀는 지난 50년 동안 꾸준히 멕시코의 다양한 풍습과 종교, 격랑의 세월을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녀는 구겐하임 펠로십, 핫셀블라드 어워드 등 유수한 예술 지원을 받은 바 있고, 다수의 사진집을 출판했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녀의 작품집 한 권(〈Images of the Spirit〉)을 소장하고 있다.

그라시엘라 이투르비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머리 위에 살아 있는 이구아나 여러 마리를 얹고 있는 여성의 사진이다. 1979년 멕시코 오아하카의 한 장터에서 촬영했다. 이 사진을 처음 보고, ‘야, 모자 참 희한하게 생겼다’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구아나였다. 이구아나가, 그것도 한두 마리도 아닌 여러 마리가 여성의 머리 위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뉴욕타임스〉에서 그녀가 이 사진을 촬영했을 때 에피소드를 소개한 바 있다. 살아 있는 이구아나들이 머리 위에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적절한 형태를 만드는 상황을 정확하게 포착하기가 쉽지 않아서, 애를 먹었을 것이다.

‘우리의 이구아나 여성(Nuestra Señora de las Iguanas)’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이투르비데의 작품은 멕시코의 벽화, 포스터, 엽서, 동상 등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벽돌 건물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팬들이 그녀의 흑백사진을 그래픽 아트로, 혹은 셀프 포트레이트로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사진에도 팬덤이 있다는 것이 부럽다. 이투르비데가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지난 50년 동안 멕시코인들의 자취와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투르비데의 사진은 멕시코 국민 정서를 담은 이미지로 멕시코인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스포츠에는 국가대표가, 연예계에는 국민가수·국민배우 등의 호칭이 존재하는데, 한국 사진계에도 언젠가는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국민 사진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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