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 시사IN 편집국
  • 호수 645
  • 승인 2020.01.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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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마다 묻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혼인과 혈연으로 묶인 ‘현실 가족’에 지친 이들에게 ‘비정상 가족’을 다룬 해외의 드라마·영화·다큐멘터리 여섯 편을 소개한다.
ⓒ<이웃집 가족은 푸르게 보인다> 홈페이지 갈무리<이웃집 가족은 푸르게 보인다> (왼쪽)는 공동 조합주택에 사는 ‘다양한 형태의 네 가정’을 그린다.

양정민 (자유기고가)

일본 드라마 <이웃집 가족은 푸르게 보인다> 10부작, 왓챠플레이

어린 시절 내 눈에 명절은 어른들이 각자의 자식을 ‘출품’하는 행사 같았다. 외모나 성적에 따라 나는 알맞게 부풀려지고 그러다 갑자기 납작해지기도 했다.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시선을 TV로 돌리면 그 안에는 항상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색동 한복을 입고 젊은 부모의 손에는 고향에 가져갈 선물 꾸러미가 한가득이었다(이때 장소는 반드시 서울역이어야 한다). 고향집에선 3대가 모여 윷을 던진다. 저 사람들, 재연배우는 아닐까? 혹은 매년 같은 화면을 내보내는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좀 더 자라서 알게 됐다. 사실 그런 집은 TV에나 나올 정도로 드물다는 걸. 명절마다 모여서 ‘천하제일 자식대회’를 열던 친척 어른들의 마음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내 삶이 불안한 만큼 남의 삶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거다. 이런 마음을 한국에선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아마 미국 속담의 직역 같지만)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라고 한단다. 일본 드라마 <이웃집 가족은 푸르게 보인다>는 그 ‘푸른’ 이웃집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드라마는 코퍼러티브 하우스 (co-operative house:공동 조합주택)에 사는 네 가정의 삶을 그린다. 가운데 공용 공간을 중심으로 네 집이 마주보고 있어 단독주택이면서도 공동주택 같기도 한 구조다. 주인공 나나와 다이키는 누가 보더라도 ‘푸르게’ 보이는 부부다. 두 사람 모두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애정도 굳건하다. 하지만 난임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부부는 자꾸만 “왜?”라는 물음에 마음을 다친다. 왜 노력으로 안 될 게 없다고 쉽게들 말하는지, 왜 근무 일정을 바꿔달라고 하는지, 왜 요즘 피로와 짜증이 늘었는지, 왜 35살이 넘는 여성은 난임 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는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쌓일수록 몸도, 마음도, 가계부도 지쳐간다.

말 못할 사연을 껴안고 사는 건 나머지 세 집도 마찬가지다. 인정받는 건축가 와타루는 동성 연인 사쿠를 조카라고 속이고 동거 중이다. 딸 둘을 둔 주부 미유키의 인스타그램은 근사한 친목 모임 사진으로 가득하지만 사실 업체에 돈을 주고 연출한 장면이다. 남편 신이치가 잦은 해외 발령에 지쳐 퇴사했다는 건 절대 들켜선 안 될 비밀이다. 평생 아이를 갖지 않기로 약속한 료지와 치히로 커플은 자유롭고 화려한 삶을 살 것만 같았지만, 료지의 전처가 죽으면서 아들 료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저마다의 괴로움을 견디는 네 가정을 향해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해답은 “다들 힘드니까 너도 징징대지 마”가 아니다. 오히려 집단에서 튀는 행동을 곧 ‘메이와쿠(迷惑:민폐)’로 여기는 일본 사회에 작은 반기를 든다. 모든 인물은 용기를 내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또 그만큼 나와 다른 처지에 놓인 이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딸에게 좋은 성적만 강요하던 미유키는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치히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료지가 아들과 다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떤 비싼 게임기보다도 장난감 회사 직원인 다이키가 선물한 카드 게임의 공이 컸다.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네 가정은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마침내 네 가정은 각각 아이 없는 삶, 동성 파트너십, 덜 경쟁하는 삶, 사실혼 관계를 택한다. 여기에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나은지 따위의 품평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네 가정 모두 왜 가정을 이루고 살려 하는지를 자신에게 차분히 되묻고, 그 답에 따라 다양한 형태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물어야 하는 것도 대답해야 하는 것도 많아지는 명절, 부디 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만은 남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향해 질문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기쁨의 도시> 넷플릭스 갈무리<기쁨의 도시>(위)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는 성폭력 생존자들의 재활시설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의 이야기를 담았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미국 다큐멘터리 <기쁨의 도시>, 1시간16분, 넷플릭스

홍상수 감독은 오래전 어떤 인터뷰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데 더 어울리는 말들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너의 손을 만지고 싶어. 너의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마워. 너랑 있으니까 마음이 따뜻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네. 외로웠는데 네가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 그의 표현법을 따른다면 우리는 ‘가족’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과 있으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어, 언제든 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거부해도 이들은 날 거부하지 않을 것 같아. 그렇다. 그게 가족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기쁨의 도시>는 가족의 참된 의미를 한 편의 이야기로 표현한다. 아프리카 대륙에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30년 이상 내전이 지속돼온 나라다. 이곳 반군은 ‘전쟁 전술’의 일환으로 여성들을 강간한다. 낯선 남자에게 강간당해 돌아온 여자들은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남편과 아버지에게 버려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가족인가.

‘기쁨의 도시’는 이 나라에 세워진 성폭력 생존자들의 재활시설이다. 버려져 오갈 데 없는 여성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쉼터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의료 서비스를 지원받고, 자기방어 교육이나 리더십 훈련, 자존감 키우기 워크숍 등에 참여해 사회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이곳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여성들은 사회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완전한 쉼, 무한한 포용. 그렇다면 이들은 왜 가족이 아니란 말인가. 같은 고통을 나누는 이들의 연대감은 그 어떤 가족들의 그것보다 단단하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 자신도 강간 피해의 생존자인 여성 강사가 둘러앉은 여성들의 정중앙에서 리더십 훈련을 하는 장면. 그는 여성들에게 물러나지 말라고 교육한다. 뒤에 숨어 있지 말고 앞으로 나오라고,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오라고, 일어나라고. 그러자 쑥스럽게 앉아 있던 여성들이 하나둘 일어나 춤춘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장면이다.

일본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128분

사람들은 ‘정상’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만나면 종종 그 ‘비정상성’을 근거 삼아 그 사람의 성격을 추측하곤 한다. 예컨대 이혼한 부모를 둔 어떤 사람의 성격이 어떠어떠한 편이라면, 부모의 이혼을 목격한 경험이 성격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식이다. ‘비정상성’을 절대적인 어떤 환경적 요인으로 취급해 성급하게 짐작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 아주 흔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런 편견을 아름답게 깨부수는 영화다. 일본의 옛 정취 가득한 바닷마을 가마쿠라에서 살아가는 세 자매가 아버지의 부고를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자매들은 어쩐지 덤덤하다. 이미 15년 전에 외도로 집을 나간 뒤 소식도 알 수 없었던 아버지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다른 사람과 재혼하며 집을 나갔다. 부모가 모두 나간 집에서 세 자매는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서로 의지하며 자라왔다. 세 자매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존재도 몰랐던 열세 살 이복동생 스즈를 만나는데, 이제 막 만난 스즈에게 가마쿠라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이제 그들은 네 자매가 됐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막내는 어머니가 다른 ‘비정상 가족’이지만, 그것이 네 자매의 삶에 미친 영향은 별로 없다. 영화는 네 자매에게 애써 무슨 트라우마나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려 들지 않는다. 특별히 가족애를 강조하거나 상실감 같은 것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네 자매에겐 그저 여느 사람들처럼 서로가 있고, 가꾸어야 할 예쁜 집과 매실나무가 있고, 각자의 연인들과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삶에 상실감 같은 것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 넷플릭스 갈무리대안적 가족을 소재로 한 코미디 드라마로서 <그레이스 앤 프랭키> (오른쪽)의 독창성은, 주인공을 노년층으로 설정한 데서 온다.

임수연 (<씨네21> 기자)

미국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 6, 13부작, 넷플릭스

40년 동안 같이 살았던 남편이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도 평소 돈독하게 지내던 친구 부부의 남편과 20년 동안 몰래 연애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과감한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이를 치정극이 아닌 가족의 의미를 다시 쓰는 발판으로 삼는 드라마다. 하루아침에 같은 이유로 이혼한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두 부부가 공동명의로 구입했던 별장에서 동거하게 된다. 너무 다른 성향과 성격으로 번번이 부딪쳤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여생의 반려자가 된다. 대안적 가족을 소재로 한 코미디 드라마로서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독창성은 주인공을 노년층으로 설정한 데서 온다. 새로운 가족을 만날 기회는 이른바 정상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40년을 꼬박 채운 자들에게도 올 수 있고, 이는 노인의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는 가교가 된다. 예컨대 뮤지컬 배우나 자위도구 사업에 도전하는 일까지 말이다. 두 주인공의 전남편, 로버트와 솔이 노년의 게이 커플로서 마주하는 상황이나 다문화 가정 같은 이슈도 아우르는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넷플릭스에서 시즌 6까지 제작됐다.

일본 영화 <어느 가족>, 121분

복지의 사각시대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가족이 있다. 건설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야카(마쓰오카 마유). 이들은 할머니 하쓰에(기키 기린)가 남편과 사별하고 받은 위로금과 연금을 밑천 삼아, 핏줄로 연결되지 않았음에도 한집에서 살아간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년 쇼타와 아동학대 피해자였던 소녀 주리 역시 그들의 집으로 데려와 마치 친자식처럼 키운다. 강제성이 없고 어떤 금품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괴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

<어느 가족>은 현대사회 가족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안 가족을 낭만적으로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어느 가족>의 공동체는 완벽하지 않고 결국 모순적인 상황에 봉착하며 사회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된다. 극 말미 관객에게 차가운 사유를 권하는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보다 한발 더 나아간 통찰을 보여주며 2018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당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베 총리로부터 어떤 축전도 받지 못해 논란이 됐다. 소외층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은 것이 일본 정부의 심기를 건드려서가 아니냐는 세간의 추측이 있었다.

ⓒ<결혼 이야기> 넷플릭스 갈무리미국 영화 <결혼 이야기>

미국 영화 <결혼 이야기>, 137분, 극장 및 넷플릭스

혹자는 말한다. <결혼 이야기>의 제목은 <이혼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니콜(스칼릿 조핸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가 이혼소송을 시작해 마무리되기까지 감정의 지난한 파고를 담은 <결혼 이야기>는 로맨스와 결혼제도가 한 인간(특히 여성)의 세계를 어떻게 협소하게 만드는지 파고든다. 이혼을 이야기함으로써 현대사회 결혼제도에 관한 냉철한 보고서가 됐다는 점에서 <결혼 이야기>의 제목은 적확하다. 한편 영화를 연출한 노아 바움백은 배우 제이퍼 제이슨 리와 이혼한 경력이 있다. 이후 재혼한 그레타 거윅이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등은 연인이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할리우드는 한동안 이 작품들을 노아 바움백의 창작물로 이해했고, 공동 창작자인 그레타 거윅에게 주로 붙는 수식어는 “노아 바움백의 뮤즈”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레타 거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레이디 버드>가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등 호평을 받으며 두 사람의 공동 창작물에서 여자 쪽이 기여한 지분 역시 재평가받았다는 점이다. 연애와 결혼은 여성의 재능을 남성의 것으로 흡수시키고 한쪽의 희생을 은연중에 강요한다는 분노 어린 고백이 등장하는 <결혼 이야기>는 어쩌면 감독 스스로의 성찰과도 맞닿아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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