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은 ‘증거’가 된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거주지를 옮길 경우가 대표적이다. 상담받은 기관에서 상담 사실 확인서를 발급받아 주민센터에 제출하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소를 확인할 수 없도록 등·초본 발급을 제한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상담 기록은 법적 절차를 진행하거나 지원제도를 이용할 때도 피해를 입증하는 주요 증거자료로 제출할 수 있다. 

ⓒ시사IN 신선영코로나19 유행 이후 정부 지침에 따라 전국 가정폭력 상담소는 무기한 휴관 통보를 받았다. 긴급 전화상담은 가능하다.


이 때문에 가정폭력 전문 상담소에서는 짧은 통화도 모두 기록으로 남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최소한의 상담조차 쉽지 않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정부 지침에 따라 전국 가정폭력 상담소는 무기한 휴관 통보를 받았다. 긴급 전화상담은 가능하지만 법률상담 연계 등 실질적 도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면 상담이 불가능해졌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이동제한, 재택근무, 자가격리가 전 세계의 일상이 되었다. 전파력 강한 바이러스에게 ‘안전’을 허락받은 공간은 집뿐이다. 누군가에게 집은 코로나19가 만들어낸 또 다른 사각지대다. “수많은 여성이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위협에 노출돼 있다. 경제적·사회적 압박과 공포가 커지면서 끔찍한 가정 내 폭력이 늘어나고 있는 걸 보고 있다.” 4월5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발표하고 가정폭력을 코로나19 방역관리의 일환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각국에 요청했다. 

가정폭력 신고 사례가 ‘폭증’하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한국은 되레 감소세를 보인다. 영국 BBC는 자국 내 30% 이상 증가한 가정폭력 관련 소식을 전하며 ‘개발도상국은 오히려 신고 건수가 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한국이 방역 선진국일지는 몰라도 여성 인권 측면에서는 개발도상국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라는 점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4월4일 경찰청은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1월20일부터 4월1일까지 112로 접수된 가정폭력 신고 건수(4만5065건)를 발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4만7378건)에 비해 4.9% 감소한 수치였다. 

“가해자와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상담 전화하는 것조차 어려워하세요. 상담도 이런데 경찰 신고는 말할 것도 없겠죠.” 최선혜 소장(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의 한숨이 길었다. 줄어든 신고 건수를 오히려 ‘위험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최 소장은 애초 가정폭력 피해자 중 1.7%만이 경찰에 신고한다는 점을 강조했다(여성가족부, 2016). 

ⓒ연합뉴스가정폭력 사건은 대개 상담을 조건으로 기소유예된다.


손문숙 상담팀장(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정폭력을 물리적·신체적 가해로만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저희 같은 기관에 상담 전화를 하기 전에 경찰 신고해본 피해자가 없을까요? 신고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거예요. 가해자 화만 돋우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더 위험해지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거든요. 언론 보도를 봐도 정말 죽기 직전이거나 죽어야만 그나마 기사 한 줄이라도 나잖아요.” 겉으로 티나지 않는 언어적·정서적 폭력은 훨씬 더 집요하게 피해자를 억압한다. 이는 폭력이라기보다는 손쉽게 ‘갈등’ 취급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대개 언어폭력은 신체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는다. 가정폭력 초기 개입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물리적인 가정폭력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2018년 한 해 동안 가정폭력으로 112에 신고된 24만8660건 중 입건 처리된 경우는 4만1720건에 불과하다(경찰청, 2019). 입건이 처벌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2017년 폭력 범죄 기소율이 25.8%인 데 비해 가정폭력 사건 기소율은 9.6%였다(검찰청, 2020). 여성단체들은 무엇보다 법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현행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가정폭력처벌법)은 가정의 유지와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가정폭력 사건이 검찰에 기소되더라도 형사처벌보다는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라 가정보호사건으로 가정법원 및 지방법원에 송치된다. 송치 기준도 모호하다. ‘사건의 성질, 동기 및 결과, 가정폭력 행위자의 성행 등을 고려한다.’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된 사건은 절반 가까이는 불처분되고, 대개는 상담을 조건으로 기소유예되거나 사회봉사 명령으로 처벌을 대신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2018년 가해자 상담 통계를 보면 배우자의 목을 조르거나, 담뱃불로 지지거나, 흉기로 위협하거나 휘두른 사람도 쉽게 ‘상담’ 처분을 받았다. 가해자 상담에 대한 사후 모니터링도 따로 없다. 법무부에 따르면 가정보호사건에서 피해자 접근금지 처분을 받은 사례는 2018년 기준 0.2%에 불과했다. 

이 같은 결과는 가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해 진행한다는 가정폭력 처벌법 제9조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보호사건의 처리를 규정한 제9조는 그 의도와 다르게 가해자 처벌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혼인이나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피해자 처지에서는 형사처벌 결정이 쉽지 않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합의를 종용하는 친인척과 보복의 두려움은 피해자로 하여금 쉽게 소송을 포기하게 만든다. 한때나마 친밀했던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특수성을 간과한 독소조항이나 마찬가지다. 형사소송을 통해 가해자가 벌금형을 받는 경우 상황은 더 복잡해지기도 한다. 벌금이 가해자와 경제공동체를 이뤘던 피해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권력을 통해 가정폭력 문제가 해결된다는 신뢰가 부족한 현실에서 상담은 피해자들에게 중요한 ‘자원’이었다. 손문숙 상담팀장은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는 문제를 토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다 보니 누군가에게 피해 사실을 제대로 말해본 경험조차 없는 분들이 많아요. 오랫동안 폭력이 지속되어 무기력한 경우도 많고요. 피해자 스스로도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이혼이나 소송을 해결책으로 쉽게 생각하기 어렵고요.” 전화기 한 대, 컴퓨터 한 대, 볼펜과 종이가 놓인 책상, 그리고 한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상담실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당한 일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라는 위로와 지지가 오가던 곳이었다. 

ⓒ시사IN 신선영 서울 은평구의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상담소 직원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근무를 이어가고 있다.

수화기 너머에서 시작된 상담은 상담사와 피해자가 몇 번이고 얼굴을 마주보고 이후를 계획하는 일로 이어졌고,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피해자가 폭력의 그늘에서 걸어 나와 힘겹게 자립을 시작하곤 했다. 코로나19는 그 작은 공간을 닫아버렸다. 최선혜 소장은 코로나19로 위축된 경제 상황 역시 우려했다. “실제 가정폭력으로 인한 이혼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경제적 자립이에요. 가정 내에서 고립되고 가해자로부터 통제를 심하게 당해왔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요. 그래서 평온한 시절에도 자립은 굉장히 어렵거든요.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는 건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된 거죠.” 

가정폭력 상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정현씨(가명)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새롭게 가정폭력을 경험하는 피해자들이 양산될 가능성을 걱정한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친밀한 사이에서도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폭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폭력을 처음 당하는 사람은 혼란스럽거든요. 가정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했던 피해자들은 ‘원래 그러니까’ 라며 참게 되고, 새로 경험한 피해자들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시적인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맞았다고 해서 바로 신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실제 ‘2010년 여성가족부 전국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초 폭력 발생 이후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6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47.1%로 절반에 가까웠다. 여성단체들은 정부 차원에서 ‘코로나19로 발생하는 가정폭력에 엄중히 대응하겠다’라는 최소한의 메시지라도 발표하기를 바란다. 코로나19 유행이 끝나고도 한참 후, 뒤늦게 보고될 비극이 지금 쌓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정폭력 피해 관련 상담을 받고 싶다면 아래 기관에 연락할 수 있다. 
● 여성긴급전화 1366 (24시간)
● 한국여성의전화  02-2263-6464
● 한국여성민우회 02-335-1858 
● 한국성폭력상담소 02-338-5801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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