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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정치 1번지에 노동자는 없다

울산 북구에는 ‘노동자’ 대신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가 있다. 신규 유입인구와 보수적인 자영업자도 노동정치를 포위했다. 노동정치 1번지 울산 북구’란 말은 허울뿐인 표현일지 모른다.

울산·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09년 03월 24일 화요일 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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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현대자동차 노조는 울산 북구 선거의 힘이자 짐이다. 위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퇴근 시간 풍경.
진보 진영의 눈이 온통 울산 북구에 쏠렸다. 3월12일 윤두환 의원(한나라당)이 대법원의 당선무효 판결을 받으면서 4월29일 재선거가 확정된 이곳은, 예전부터 진보 진영이 핵심 전략 지역으로 꼽는 지역구다. 조합원 2만5000명을 자랑하는 ‘거대 조직’ 현대자동차 노조의 근거지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최용규 후보는 한나라당 후보를 563표 차로 따라붙었고, 17대 총선에서는 조승수 전 의원(현 진보신당)이 7000표 차로 한나라당을 넉넉히 따돌렸다.

한 석이 아쉬운 민노당이나 원내 진출에 사활을 건 진보신당이나, ‘노동자 정치 1번지’에서 치러지는 재선거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은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울산 북구 출마를 저울질하다 불출마로 가닥을 잡자, 진보 진영에서는 “박 대표가 자칫하면 진다고 보고 꼬리를 내렸다”라며 때 이른 대세론을 펴기도 했다. 믿는 구석은 역시 현대차다. 전체 현대차 소속 조합원 2만5000명 중 9000명이 북구에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가족 표까지 고려하면 2만 표다. 북구의 전체 유권자가 11만명이니만큼, 투표율이 낮은 재선거에서 현대차 조직만 제대로 가동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게 진보 진영의 기본 셈법이다.

과연 그럴까. 왕년의 ‘노동자 정치 1번지’는 다시 한번 진보 진영 국회의원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을까. 하지만 <시사IN>이 직접 훑어본 울산 북구는 ‘노동자 도시’라기보다는 ‘노동자가 포위된 도시’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였다.

투표함이 증명한 ‘반현대차 정규직’ 정서

“저 자리가 원래 야트막한 새마을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우리 표가 70%씩 나오던 곳이다. 그러다가 재건축으로 브랜드 아파트 ‘힐스테이트’가 들어오면서 외지인이 대거 자리를 잡았다. 예전만큼 표가 나올 리 있겠나.” 진보신당 조승수 전 의원 캠프 관계자는 현대자동차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울산 북구는 지난 몇 년간 수도권 이상 가는 거센 아파트 건설 열풍을 겪었다. 그 결과, 17대 총선 이후 겨우 4년 만에 유권자 2만2000명이 늘었다. 현재 유권자 11만명의 20%가 신규 유입 인구인 셈이다. 이들 유입 인구의 정서는 일반적인 영남권 정서와 다르지 않다는 게 지역 선거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나라당 지지세가 강하다는 얘기다. 자연히 노동자 도시라는 색깔은 갈수록 묽어졌다. 실제로 신축 아파
   
재선거가 확정된 울산 북구(위)에 선거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트가 많이 들어서 유권자 1만3000명이 늘어난 농소 1·2·3동의 선거 결과를 보면, 2004년 한나라당보다 2000표를 더 얻은 민노당이 2008년에는 이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에게 4400표 뒤졌다.

진보 진영의 더 큰 골칫거리는 따로 있다. 울산 북구는 현대차 노조의 강력한 조직력만큼이나 ‘반(反)현대차 정서’가 강한 곳이다. 현대차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내 비정규직과, 1차·2차·3차로 철저히 서열화된 하청업체는 ‘반현대차 포위망’의 선봉 격이다.

“투표 좀 하라고 돌아다녀보면 반응이 한결같다. ‘머할라 찍는데요? 저거들이 머 해준 게 있다꼬’라며 돌아서버린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미는 후보? 낙선운동 안 하는 게 다행이다.” ‘사장님들’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 이승희 지회장의 말이다. 최대 1만명으로 추산되는 현대차 사내 비정규직은 정규직 노조 이야기만 꺼내면 고개를 젓는다. 이승희 지회장은 “정규직 노조가 조합주의에 매몰돼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사용해온 역사가 있다. 고용 보장을 해도 정규직 우선, 하다못해 볼트를 쪼아도 정규직 5개 할 때 비정규직 10개, 뭐 이런 식이다. 감정이 좋을 리 있겠나”라고 말했다.

이들의 반감은 투표함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대차 공장이 있는 양정동·염포동 지역은 17대 총선에서 민노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각각 43%·32% 포인트 차로 압도하던 지역이다. 하지만 18대 총선에서 그 차이는 각각 15%·4% 포인트로 급감했다.

“현대차 조합원 부인도 민노당 후보 안 찍어”

주거 환경이 열악한 이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은 정규직 노동자가 떠나간 까닭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거주 비율이 높은 편이다. 현대차 내 비정규직의 절반이 이 일대에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울산 북구 중에서도 ‘노동자 정치의 심장부’인 이 지역조차 비정규직 표의 대규모 이탈로 진보 진영의 승리를 장담 못하게 됐다는 얘기다.

   
중대형 평형 아파트 단지가 연이어 들어서면서, 울산 북구의 ‘표밭’ 역시 토양이 달라졌다.
하청업체 노동자 역시 강력한 ‘반현대차 포위망’의 한 축이다. 하청업체 노동자는 ‘CR(코스트 리덕션·납품단가 인하)’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떤다. 현대자동차 경영진이 노조와의 임금협상 타결 후에는 어김없이 하청업체를 찾아가 CR 목표치를 들이밀며 업체를 ‘쥐어짜는’ 탓이다. 현대차 노동자의 임금인상분을 하청업체 노동자가 부담한다는 인상을 받기 충분하다.

그 원인을 “회사의 속보이는 노동자 분열 책동”(전직 현대차 노조 간부)으로 보든 “현대차 노조의 이기주의”(1차 하청업체 노조 대의원)로 보든 간에, 현대차 노동자에 대한 하청업체 노동자의 반감이 상당하다는 현실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울산 북구에서 하청업체가 모인 효문동의 투표 결과를 보면, 2004년에 20% 포인트 앞서던 민노당은 2008년에 14% 포인트 뒤졌다. 하청업체라지만 민주노총에 속한 조직 노동자가 많은 곳임에도 투표함이 보여준 정서는 ‘노동자 정체성’이 아니라 ‘반현대차 정규직’이었단 얘기다. “여기서는 동창회나 계모임도 함부로 못한다. 현대차 사람하고 하청업체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간 싸움만 나니까.” 택시 운전을 하는 김성대씨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곳이 울산 북구다.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기엔, 울산 북구의 ‘노동자들’ 사이를 가르는 벽은 높았다.

이렇듯 ‘포위망’이 두껍다 보니, 진보진영 처지에서는 ‘집토끼’인 현대차 조직표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오히려 강해진다. 어쨌거나 2만 표만 확실히 단속하고 낮은 투표율 덕을 보면 적어도 재선거는 승산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지역 선거 전문가들은 “조직표 2만 표도 허상에 가깝다”라고 입을 모은다.

2005년 재선거의 민노당 캠프에서 노동팀장으로 일했던 하부영씨는 울산에서 1988년 13대 총선부터 20년간 진보 진영 선거운동을 해온 ‘선거통’이다. 그는 “민노당과 진보신당 분당 이후, 현장에서는 ‘투표 거부 정서’까지 생겼다. 환멸과 좌절감이다. 2004년에는 일반 조합원까지 교대로 월차를 내고
   
선거운동을 한 반면, 지금은 대의원조차 시큰둥하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역 여론분석기관인 ‘울산리서치’의 고영호 전 대표는 “가족표 개념도 허구다. 현대차 조합원의 부인도 진보 정당을 찍지 않는다. 중산층 정체성이 노동자 정체성을 압도한 거다. 부인이 돌아서버리니, 현대차 조직이 지역사회에 침투하지 못하고 공장 담벼락 안에 고립됐다. 필패 구도다”라고 분석했다. 조직표에 들어간다고 속 편히 계산했던 가족표마저 실상 ‘포위망’의 한 축이었다는 얘기다.

“조직표로 이길 생각 말고 판을 새로 짜야”

조직표 의존 전술이 비판받는 이유는 또 있다. 진보 진영이 울산 북구에서 맞이할 상대인 한나라당이야말로 ‘조직선거의 달인’인 까닭이다. 하부영 전 노동팀장은 “구의원에 200명, 시의원에 300명씩 할당을 줘서 바닥을 훑는데, 당할 재간이 없더라. 지방의회에 한나라당 의원 수가 좀 많나”라며 혀를 내둘렀다. 한나라당 조직 선거의 또 다른 축은 자영업자다. “현대차에 적대적인 자영업자층 역시 한나라당이 장악하고 있다. 미용실과 부동산은 동네 여론 형성의 장이다. 여기가 넘어가면 그 동네 선거는 끝난 거라고 보면 된다.”

현대차 노조의 조직력에 의존하는 울산 북구 진보 진영의 선거 전략이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쳤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울산리서치’ 고영호 전 대표는 “아무리 늦춰 잡아도 2008년 총선이 ‘노동정치’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마지막 선거였다. 이제 노동정치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보인다. 조직표 대결로는 가망이 없다”라고 말했다.

대신 그가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연대’와 ‘바람’이다. ‘반MB·반한나라’ 성향의 표를 결집하고, 그 응집력을 밑천으로 바닥에서부터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얘기다. “17대 총선 때 민노당의 승리는 현대차 정규직 이외의 노동자와 민주당·개혁 성향 유권자가 민노당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까지 투표장으로 끌어낼 만한 설득력 있는 ‘판’을 짜는 게 울산 북구에서 진보 진영이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울산 북구가 ‘노동정치의 1번지’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그동안 익숙했던 ‘노동정치’의 틀을 깨는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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