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
  •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 호수 625
  • 승인 2019.09.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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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켈 그림

해마다 가을이 되면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가을은 내게 이동과 변화의 계절이다. 서울에서 작은 이사를 일곱 번쯤, 큰 이사는 두 번을 했다. 택배로 큰 짐을 부치고 온갖 가방과 쇼핑백에 남은 짐을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대중교통으로 짐을 나른 것은 작은 이사고, 승합차며 트럭을 동원해야 했던 것은 큰 이사다. 큰 이사 때마다 계절이 가을이었다.

10년 전 서울에 올라왔다. 한 달, 3개월 혹은 6개월, 길면 1년짜리 계약으로 기숙사와 고시원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 7년 전 처음으로 내 명의로 원룸을 얻었다. 원룸은 임대주택이었고, 입주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살던 방과 이사를 들어갈 방 중 어느 쪽 월세가 더 싼지 계산하고, 한 달이라도 이득을 보려고 10월 넷째 주 이사를 결정했다. 그 후로 자연스레 가을에 이사를 한다.

가을에 이사하면 집을 사랑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봄의 꽃가루와 황사, 여름의 습기와 폭염, 겨울의 건조함과 혹한을 견디기 어려운 한국인에게 가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사 간 집의 단점은 가을이 끝날 즈음 알게 되고, 겨울은 상상 외로 끔찍했다. 보일러는 제대로 돌아가는지, 오래 비어 있는 동안 벌레 천국이 된 곳은 아닌지, 단열 문제로 벽에 곰팡이가 잔뜩 끼지는 않는지. 맞이한 겨울이 너무 혹독할 때 가을의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잊혔다. 시간이 흐르며 겨울을 덜 괴롭게 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지난해 가을 출연했던 한 다큐멘터리

원룸을 얻었을 때 ‘자기만의 방’이 소중하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 삶이 결혼으로 완성될 거라 믿었기에 그 공간을 오래 쓰지 못할 물건들로 채웠다. 이사 오고 나서는 거실이 있는 집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타인을 환대할 수 있는 공간을 기반으로 넓어지는 인간관계의 즐거움을 알았다. 결혼으로만 가족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친밀과 돌봄을 나누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부르며 지냈다. 이제, 식구 중 하나가 이 집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해 가을,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비혼 지향 생활공동체’로 지내는 우리가 놀랍게도 공영방송 ‘저출산’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저출산 고령사회의 원인으로 비혼을 쉽게 지목하곤 하는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작진과 부딪쳐가며 의견을 조율하고 출연을 결정한 것은, 우리에게 당시 일곱 살짜리 이웃인 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비혼주의자들이 ‘아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좋은 방송 아이템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은서는 떠나는 식구인 주은이에게 작별 편지를 주러 왔다. 은서를 볼 때마다 그 아이에겐 30대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집에 살면서 배운 가장 소중한 점은 행복은 추억을 좇는 데도, 미래를 바라는 데도 있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을 힘껏 사랑하며 지금을 사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식구가 나가며 함께 마련하던 월세 부담이 커졌고, 또 이사 갈 시간이 되었다. 내 삶은 고정하려 해도 계속 흘러가고 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있기만 하다면, 그 안정적인 미래로 바로 이동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번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은 의미 있었다. 순간이 특별해지는 것은 일상에서 어떤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 덕분이다. 이별을 생각하며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밀도 있는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잘 살고, 잘 죽고 싶다고. 미래가 어떤 모양이 되든, 지금의 이 가을을 충분히 즐기고 싶다고. 지금을 잘 산 다음에야 내일의 나도 괜찮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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