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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독재 부순 힘으로 자본 독재에 맞서다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니 나서지 말자는 신부도 있었다. 민주화운동 선후배들까지 삼성의 입이 되어 사제단 앞에 섰다. 현직 최고위급 관료도 삼성의 뜻을 전하려고 신부들을 찾아왔다. 그러나 사제단은 ‘삼성 비리 &

주진우 기자 ace@sisain.co.kr 2007년 11월 03일 토요일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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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안희태
지난 10월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삼성 문제’로 기자회견을 하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
 
 
1987년 5월18일 오후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광주 민주항쟁을 기리는 미사가 열렸다. 미사 말미에 김승훈 신부가 조용히 단상에 올랐다. 그러고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라는 성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김 신부의 목소리는 떨렸고, 신자들은 숨이 멎는 듯했다. 전날 김 신부는 함세웅 신부로부터 성명을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두 사제 모두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구속은 피할 수 없었다. 모두가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했다. 오직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영등포교도소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을 들은 이부영(전 국회의원)은 민주화 운동 동지인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김정남 전 수석은 “이부영의 편지를 종합해 문서를 만들어 친한 야당 의원에게 갔더니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외면했다”라고 말했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정남 전 수석은 마지막 기대를 사제단에 걸었다. 사제단은 민주화 운동 진영의 보호막이었고, 버팀목이었다.

“사제단은 이 시대 양심이자 도덕성의 보루”

김 전 수석은 천주교 서울교구 홍보국장을 맡고 있던 함세웅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함 신부는 1976년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과 함께 3·1민주구국 선언을 발표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함 신부는 망설임 없이 사제단의 성명을 준비했다. 김 전 수석은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편지를 썼지만, 추기경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워했다.

수십 차례의 회의와 모의 끝에 사제단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흘 만에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고문살인범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재수사를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했다는 책임을 물어, 노신영 총리와 내무·법무 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이 경질됐다. 사제단의 성명은 6월 항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의 몰락을 가져왔다. 사제단 고문 황상근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도덕의 힘이, 정의가 불의를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고,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라고 말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마저 봉쇄했다. 그런데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였다는 이유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사제들이 전국 각 교구를 순회하며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됐다. 당시만 해도 가톨릭은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독재 정권과 결탁한 주교들은 사제단의 활동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인혁당 사건, 3·1명동사건, 오원춘씨 사건, 최종길 교수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부산 미국 문화원 사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문규현 신부·임수경 방북 사건…. 사제단은 온몸을 던져 독재 정권에 저항했다. 거리에서,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형무소에서 가장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가파른 절벽 길을 피하지 않고 걸어왔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는 “사제단은 이 시대 양심이자 도덕성의 보루였다. 양심과 정의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1987년 1월26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100여 명이 박종철군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위).  
 
지난 10월18일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50)가 사제단을 찾았다. 김 변호사는 사제단을 찾기 전에 여러 시민 단체와 언론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삼성과 싸울 수 없다고 했다.

사제단의 고민도 컸다. 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는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을 듣고 기도했다. “삼성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비참하게 쫓겨나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수했던 성서 구절을 떠올렸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감수해야 한다며 ‘하나님, 제발 꾀돌이 아히도벨의 꾀를 뒤엎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돈과 권력으로 은폐 조작하는 삼성의 불의의 꾀를 엎어주십시오’ ‘정말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을 발표하며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발표할 때의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뜻밖의 사건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그리고 우리 사제들에게 새로운 은총의 기회를 주셨다. 그 기회를 제때 포착하지 못하면 신앙인이나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결단하게 되었다.”

삼성과 검찰 꾸짖을 단체는 사제단뿐

함세웅 신부는 20년 전 동지인 김정남 전 수석과 이부영 전 의원을 불러 상의했다. 둘은 조심스러웠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니 나서지 말자는 사제단 신부도 적지 않았다. 기자회견 직전까지도 회견을 막아야 한다는 신부가 있었다. 더구나 사제단에 손을 뻗치는 삼성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제단에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신부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신자들은 물론 민주화 운동의 선후배와 정부 고위 관료들까지 나서 삼성의 입이 됐다.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 지켜온 사제단의 명성에 흙탕물을 튀길 것이다.” 심지어 현직 최고위급 관료도 삼성의 뜻을 전하러 찾아왔다.

   
  사제단 신부들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주도했다. 가운데 선 이들 중 오른쪽이 함세웅 신부.  
 
하지만 사제단이 아니면 삼성과 검찰의 오만을 꾸짖을 단체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는 “삼성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단체가 없었다. 삼성이 신부들의 뒤를 캐거나 약한 신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했다. 중요한 건 사제 정신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0년 만에 사제단이 나섰다. 나서야만 했다. 그래서 지난 10월29일 사제단은 ‘삼성그룹과 검찰은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사제단 김영식 신부는 “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삼성과 검찰 문제는 지금까지 싸웠던 그 어떤 문제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중요하다. 삼성의 고백과 검찰 수사를 위해,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성직자의 길을 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제단 대표를 맡고 있는 전종훈 신부는 “20년 전 독재 정권에 맞섰던 사제단이 이제는 경제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위해 나섰다. ‘자본 독재’에 맞서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전 신부는 “사제단이 사라지면 이 시대에 기댈 곳이 없어진다. 진실이기에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결코 지면 안 되는 싸움에 나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제단은 돈 가진 자들이 오만하지 않고, 검사들이 돈 가진 사람에게 비굴하지 않고, 국민이 돈 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묵묵히 걸어갈 것이라고 한다. 임시 총회와 운영위원회가 열리고, 전 교회의 동참을 요구할 것이라고 한다.

사제단의 행동에 대해 삼성 고위 관계자는 “민주화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유신 시대에 등불이 된 분들이 왜 기업 일에, 그것도 한 개인의 하소연을 가지고 나서는지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지난 10월26일 각 언론사 산업부장들은 전 MBC 앵커 이인용 전무의 주도로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을 견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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