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서 좋을까”
  • 이해영 교수
  • 호수 600
  • 승인 2019.03.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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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의 독서일기 ‘안익태는 애국자여야 했을까’에 부쳐

평소 눈에 띄면 즐겨 읽던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필자가 내 책 <안익태 케이스>를 다뤘다기에 살펴 읽었다(<시사IN> 제599호). 하지만 어째 좀 평자의 불편한 심사가 드러나는 데다, 내가 책 쓴 의도를 데면데면 파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나 파악도 맞지 않는 것들이 있어 여기서 짚어본다.

먼저 사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말이 있다. 장정일에 따르면 “그(안익태)가 1943년 8월 18일, 나치의 인종차별주의 아래서는 지휘대를 유색인에게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된 영광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장정일은 나치독일이 고전음악계에서 유대인 지휘자를 추방해 생긴 ‘빈 틈’을 안익태가 “파고들었다”고 했다. 자문해본다. 장정일이 보기에 이것이 왜 “영광”스러울까? 아시아의 열등 인종 곧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치 독일은 일본인을 ‘명예 아리안족(Ehrenarier)’이라 불렀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베를린 필하모니 지휘대에 오른 일은 드물지 않다. 일본의 명문화족이자 전시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 고노에 히데마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총 7회 지휘했다. 두 번째는 일본의 지방부호 집안 기시 고이치다. 세 번째는 만주국 국가를 작곡한 야마다 고사쿠다. 네 번째는 ‘천재 음악가’로 일컬어지던 오타카 히사타다다. 다섯 번째가 나치 시절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쓰여 있길 ‘일본 동경 태생’인 에키타이 안, 곧 안익태다. 안익태는 1943년 8월18일 베를린 방송타워 앞에서 열린 비정규시즌 특별연주회를 지휘했다. 딱 한 번이었다. 유색인에게 허용한 영광이 이 정도다. 단언과 단정 이전 사실의 확인은 이다지 고통스러운 법이다. 장정일의 말처럼 이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의 외곽 선전기구인 ‘독·일(獨日)협회’의 후견이 있었다. 어떤가, 영광스러운가.

이해영 지음, 삼인 펴냄


장정일은 말한다. 나의 책 “<안익태 케이스>의 차별점은 일·독협회를 나치의 위장된 국가 조직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를 특수공작원이었다고 새삼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일·독협회를 나치의 위장된 국가 조직”이라고 “애써” 강조한 것은 맞다. 하지만 하나가 빠졌다. ‘처음’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를 특수공작원이었다고 새삼 주장”한 것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주장이 최초로 나온 것은 2015년 프랑크 호프만의 책에서다. 내가 이 견해를 아마 처음 본격적으로 다룬 것 같다. 안익태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일제의 특수공작원이라면, 이 집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기식한 에키타이 안의 신분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왜 이것이 그렇게 ‘새삼’스러운가. 나로선 장정일이 ‘애써’니 ‘새삼’이니 하는 부사를 동원해 정작 중요한 사실에 대한 주목보다, 나의 학자적인 성실성에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정일에 따르자면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지만, 그들이 ‘직업 스파이’가 된다는 것은 별개다. 그런 뜻에서 안익태는 스파이가 맞고, 직업 스파이는 아니다.” 과문한 나로서는 장정일의 주장,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는 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혀 새로운 ‘학설’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는 다는 말은 괴이하고, 스파이는 되고 직업 스파이는 안 된다는 말은 해괴하다. 여전히 더 조사해야 할 문제인 안익태의 ‘스파이’설을 이렇게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이도저도 아닌 걸로 대충 넘어가자는 것인지 나는 그 효과를 우려한다. 밀정은 되고 ‘직업적’ 밀정은 안 된다, 그런 말인가.

내 책의 결론 가운데 하나를 일러 장정일은 쓰고 있다. “국가는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을 따지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수긍되지만, 공모를 통해 국가를 새로 정하는 제언과는 마찰을 일으킨다. 가사와 곡을 출품하는 시민은 먼저 ‘애국적인가, 아닌가’부터 심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그가 훗날 이민을 가도 큰일이다)”. 글쎄, 이 글로벌 시대에 ‘애국’의 기준이 이민 여부가 아닐진대 굳이 이를 ‘큰 일’로 삼을 일은 아니다. 더불어 공모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새 애국가가 문제될 때마다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었다. 나는 책에서 이 논의 과정을 아주 길게 추적해놓았다. 그리고 공모가 제기될 때 그 누구도 해당 시민의 애국성을 ‘먼저’ 심사하자고 한 것을 보질 못했다. 심사 사나운 공연한 어깃장 아닌가 싶다.

장정일이 나의 책머리를 언급했을 때 나는 마음 한편에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나의 책머리에 있는 구절은 이런 것이다. “안익태의 행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10여 년인지라 앞선 좋은 연구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빈 곳이 많았다.” 그런데 장정일이 보니 문제가 생겼단다. “그렇다면 제대로 훈련받은 기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질문도 이런 것이어야 한다. ‘앞선 연구들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고, 이번에 나온 책이 앞선 책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죠?’ 이런 질문은 없어서도 안 되고, 기사에서 누락되어서도 안 된다. 마치 짜기나 한 것처럼 어느 기자도 이 질문을 하지 않는 바람에 세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 독자들이 다른 책을 비교할 기회를 잃게 됨으로써 기사에서 정보를 얻어야 할 독자의 권리가 사라졌다. 둘째, 앞선 저자들의 책이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응분의 명예가 박탈되었다. 셋째, 앞선 저자의 업적과 자신의 책을 비교하면서 저자(이해영)가 자신을 자랑할 기회, 혹은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에 대해 저자가 변명할 기회를 빼앗았다.”

그리고 장정일은 내가 말한 복수의 “앞선 연구들”에 대해, 그것은 이경분의 책 <잃어버린 시간>“뿐”이라고 애써 그리고 새삼 강조한다.

먼저 말해두자. 왜 장정일은 내가 말한 복수의 선행 연구들을 단수라고 강변하고 있을까. 책의 내용, 수많은 주석 그리고 뒤에 달린 참고 문헌들을 일별만 했어도 알 법한 것인데 말이다. 나는 이경분뿐만 아니라 고(故) 노동은, 전정임, 허영한, 송병욱의 선행 연구들을 참고하고 도움받았다. 살피건대 장정일은 뒤 4인의 연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감독이 선수가 아니듯, 평자가 저자는 아니다. 최소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우선 경청한 뒤에 평하는 것이 순서이자 예의다. 후려치기 식으로 마치 전지(全知)적인 지위에 있는 양, 당신이 말한 건 이거니까 이렇게 알아 식은 아무래도 아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도 서평기법일까?

근대 이후 글쓰기의 최우선 기본은 내 것(생각)과 남의 것(생각)을 구분 짓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저 복잡한 인용격식이 정해져 있는 거다. 장정일은 두 개의 ‘기회’, 곧 “저자가 자랑할 기회”와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에 대해 저자가 변명할 기회” 가운데 후자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인용한 다수의 선행 연구들을 서평자인 본인이 나서 아니라 하고, 나의 지인인 이경분‘만’을 끌어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장정일을 선의로 읽는다면 그는 나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고 싶었을 거다. 이미 수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그래 이런 것이다.

첫째, 내가 발굴한 에하라 고이치의 1950년대 발표 에세이 두 편에 대한 분석은 선행 연구에 없는 것이다. 둘째, 1938년 2월 안익태가 아일랜드 일간지 인터뷰에서 말한 ‘프린스 리’에 대한 의문 역시 처음 제기하는 것이다. 셋째, 임시정부가 안익태 애국가를 국가로 승인했다는 속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넷째, 독·일협회가 나치의 위장된 외곽조직이라는 판단은 내가 처음이다. 다섯째, 에라하의 수필에 근거해 안익태가 1941년 연말에 베를린으로 이동했고, 이미 이 과정에서부터 에하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 역시 그렇다. 여섯째, 안익태가 동석한 에하라 고이치 사저에서 열린 슈트라우스의 생일파티 참석자 가운데 나치 선전성 음악국장이 있었음을 밝혔다. 일곱째, 에키타이 안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의 내용을 소상히 밝혀 신원보증 주체가 게슈타포라고 했다. 여덟째, 에하라의 증언에 근거해 안익태작 <만주국> 4악장의 주제 중 하나가 ‘중국’ 곧 만주국의 멜로디에서 가져왔음을 밝혔다. 아홉째, 내가 새로이 발굴한 바르셀로나 라디오방송국 편성표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중 안익태의 <만주국>이 적어도 세 차례 심야에 방송되었으며, 1946년 바르셀로나에서 <코리아 환상곡>이 다시 ‘초연’되었음을 밝혔다. 열 번째, 위에서 말한 <만주국>의 멜로디가 1944년판 <코리아 환상곡>에서 ‘습작노트’로 삭제되었다가, 1950년대에 다시 포함되어 지금도 부르고 있음을 밝혔다. 열한 번째, 당대 일본 음악잡지를 통해 1942년 9월18일 만주국 연주회는 보다 큰 만주국 10주년 행사의 일환임을 밝혔다. 열두 번째,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서 ‘에키타이 안 파일’ 분석을 통해 에키타이 안을 비엔나에 데뷔시킬 때 독·일협회가 깊이 개입했고, 그와 슈트라우스의 조우 역시 이 일환으로 파악했다. 열세 번째, 이승만 문서를 통해 안익태와 이승만 사이 각종 청탁 과정을 처음으로 밝혔다. 열네 번째, 원래 나의 책은 안익태 케이스를 통해 현재를 읽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의를 안익태의 베를린 시절을 넘어 지금, 여기까지 끌어오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안익태가 개입한 서울국제음악제 논란을 분석, 소개한 것도 처음이다. 열다섯 번째, 안익태를 가상의 반민특위 법정에 회부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장정일을 도울 길이 없다. 찬찬히 다시 제대로 읽어주면 고맙겠다. 내가 말한 ‘선행 연구들’을 읽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가 ‘세 가지 문제’ 운운한다면 이어진 그의 말이 누구를 설득하겠는가. 하지만 그의 서평을 계기로 내 ‘자랑’할 기회가 열린 데는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단 한 사람, 그가 만일 ‘애국가’를 만든 사람이라면, 그 사람만이라도 애국적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과도한 것인지 묻고 싶다. “안익태는 애국자여야만 했을까”라고 물을 일이 아니다.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서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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