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의 기술자 ‘독소서퍼’
  • 심보선 (시인·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 호수 599
  • 승인 2019.03.09 14: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라면, 칼럼을 쓰면서 지식인으로서 명성과 지위를 확보하려는 교수들을 ‘독소서퍼(doxosopher)’라고 불렀을 것이다. 독소서퍼의 행태는 정치인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오래전 캠퍼스에서 목격한 일이다. 중년으로 보이는 오토바이 배달기사 한 분이 주행 중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것들이 무슨 교수고 지식인이야!” 마구잡이로 세워둔 자동차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빠져나가다 짜증이 치민 기사가 무심결에 외친 것이다.

배달기사의 교수·지식인 비난을 듣고 생각했다. 성장 기계로 전락한 대학에서 성찰적 지식의 생산은 난망해지는데, 아직도 지식인에 대한 기대를 대학에 투영하는구나.
 

ⓒ시사IN 이명익

사실 대학교수들이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인정받는 영역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수들이 지식인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꽤 오래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영역이 있다면 신문이나 시사 잡지의 칼럼일 것이다. 많은 교수가 칼럼을 쓰고 어느 매체에 칼럼을 쓰느냐가 지식인으로서의 인지도와 관계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라면, 나를 포함해 칼럼을 쓰면서 지식인으로서 명성과 지위를 확보하려는 대학교수들을 ‘독소서퍼(doxosopher)’라고 불렀을 것이다.

부르디외는 독소서퍼가 필로서퍼(philosopher)의 반대편에 자리한다고 주장한다. 독소서퍼는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기는 여론의 기술자”이다. 독소서퍼는 필로서퍼처럼 상식을 파고들어 그 이면의 당연시된 가정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독소서퍼는 상식을 무기 삼아 여론을 공략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는 비즈니스맨이나 정치인의 행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단순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 필로서퍼가 될 순 없다. 오히려 이 시대에는 비판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여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의 이름으로 악을 판단하고 정의의 편에서 부정의를 징벌하는 것이야말로 독소서퍼가 즐겨 사용하는 기술이다.

 

 

 

 

 

짧은 칼럼에서 진리를 판별하고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긴 글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는 것 많고 똑똑한 교수·식자들은 칼럼 속에 적절한 정보를 능란하게 압축하고 연결하여 마치 모자 속에서 토끼를 끄집어내듯 진리 효과를 선보이곤 한다. 하지만 마술쇼가 성공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마술사가 관객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간파하고 또한 그 기대에 잘 부응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독자들은 유려하고, 흥미진진하고, 잘 읽히고, ‘한 방’이 있는 칼럼을 지식인다움의 증거로 간주한다. 이제 글쓰기에서조차 중요한 것은 퍼포먼스이다.

주차라는 비유를 끌고 오자면 잘 쓰인 칼럼은 정연하고 유기적인 캠퍼스의 주차 질서와 같은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그처럼 멀끔한 주차 질서는 상식을 의문시하고 진리를 탐색하는 성찰적 역량보다는 여론을 간파하고 그것에 부응하는 퍼포먼스·기술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얼마 전 연구실을 이사하게 됐다. 대부분의 일은 용달기사님이 했지만 옆에서 조금 거들기도 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트럭에 기대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가 내게 말했다. “캠퍼스가 참 예쁘네요. 대학에 다니면 이런 게 좋은 거 같아요.”

주차 질서로 지식인다움을 판별한 앞서의 배달기사분과 달리 용달기사님은 어여쁜 캠퍼스 이면에 숨은 진실 한 조각을 꺼내들었다. “이렇게 캠퍼스 안에만 있으니 교수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죠.” 이 말에는 상투적인 반지성주의가 배어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일을 하다 문제가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럼 다들 너무 자기 입장에서만 이야기해요. 그럴 때 힘들어요.”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용달 끌고 대학에 자주 와봤지만 학생식당에서 밥 먹기는 처음이네요.” 기사님 말에 내가 말했다. “여기 교직원 식당이에요.”

생각해보니 이 말은 내 지위를 굳이 드러내는 것 같아 스스로도 재수가 없게 들렸다. 그래서 덧붙였다. “그런데 학생들도 많이 와요.” 곧이어 다시 덧붙였다. “아무나 와요.” 덧붙이고 덧붙여도 뭔가 깔끔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따사로운 봄기운이 우리 둘을 감싸왔다. 비록 체감온도는 다를지라도 그것이 우리 둘에게는 그날 주어진 것 중 가장 공평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