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정책 키워드는 ‘문화민주주의’이다. 문화민주주의의 목표는 예술에 대한 접근성과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회학적 연구들은 입장료를 낮추고 ‘소외지역과 계층’에 예술을 보급하는 것만으로 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예술은 나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나와 다른 사람들, 경제적 여유와 시간이 있고 어릴 때부터 예술에 친숙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내게 돈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예술이 아니라 다른 데 투여할 것이다.

문화민주주의는 예술을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아의 표현과 공동체적 유대를 위한 자원으로 간주한다.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에서 예술이 시민사회의 신뢰와 참여를 촉진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외의 다수 연구가 예술적 경험과 창의적 활동이 개인의 인성과 지성 발달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커리어’로 인식된 예술

실제로 한국에서도 지역의 문화센터,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같은 문화예술 기관들은 주민을 위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특히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눈에 띈다. 노인을 위한 글쓰기, 연극, 무용 같은 프로그램들은 예술적 기예를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적 형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기회를 제공한다. 유소년을 위한 독서 모임도 활발해 보인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책을 읽으며 다른 의견과 취향을 가진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시사IN 자료

물론 문화민주주의 정책이 별 문제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관들은 전문 예술가들의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때때로 기관들은 예술가들을 피고용인처럼 취급하며 기존의 관행적 프로그램을 떠맡겨버리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도구화하는 기관의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갖는다. 결국 예술가들은 더 이상의 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경제적 보상만을 취하는 방식으로 일에 임하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노인들은 앞만 보고 줄기차게 달려온 삶에 대한 보상처럼 예술을 즐기고 아이들은 질주하기 직전의 짧은 여유처럼 예술을 즐긴다. 하지만 정작 개인과 시민으로 성장하는 단계에 들어선 청소년들의 삶에 예술은 어떻게 기여하는가? 과연 청소년들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가?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중학생인 아이의 꿈이 예술 기획자라며 나에게 조언을 부탁한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아이를 본 지 오래됐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요청에 임했다. 그런데 아이를 만나러 간 자리는 마치 인터뷰처럼 진행됐다. 아이는 노트북 컴퓨터를 펼친 채 질문을 했고 나의 답변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나와의 질의응답은 고교 입시 준비의 일환이었다. 성심껏 대화에 임했지만 나는 ‘삼촌’에서 ‘전문가’로 지위가 격상된 것인지 격하된 것인지 헷갈리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청소년들에게 예술은 하나의 커리어로 인식되며, 부모가 가지고 있는 인맥과 소득과 취향은 그들의 커리어 계발에 도움을 주는 자원으로 기능한다. 이때 예술은 말 그대로 자본이며, 이 자본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 같은 사회적 사실 때문에 부모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예술이고 자시고 아이들이 나만큼이라도 벌어먹고 살았으면 좋겠어.” 중산층 부모에게서 나온 이 고백은 지극히 비관적인 경제주의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신들보다 잘살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안다. 성공이 아니라 평균이 목표인 이들에게 예술은 사치인 것이다.

문화민주주의가 주장하듯 예술이 개인과 공동체에 그렇게 중요하다면 예술은 모든 이에게 평생 제공되는 공공재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성장기인 청소년 시기에 예술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자본이라면, 예술이 특정 연령의 특정 집단에게만 주어지는 한시적 복지사업이라면, 예술이 공공재라는 말은 허언에 불과하다.

기자명 심보선 (시인·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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