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통장으로 이체되고, 선물은 택배로 배달되거나 스마트폰으로 전송되는 시대. 퇴근하는 아빠의 손은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한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 웃옷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월급봉투를 꺼내 건네는 손, 붕어빵이나 통닭, 과일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에 엄마와 아이의 눈길이 쏠렸다. 그런 다음 다시 아빠에게 향하는 눈길에는 존경·감탄·감사·선망 같은 것들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시대 아빠들도 그런 시선을 받을 수 있지만, 식구를 위한 고된 노동의 결과가 집약되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은 어쩌면 거의 사라진 게 아닐까. 〈아빠 새〉가 그런 추억과 조금은 쓸쓸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빠 새〉는 독도의 쇠제비갈매기 한 마리가 새끼에게 먹일 물고기를 사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책이다.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캐릭터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독도 환경을 보여주거나 새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파도치는 바다와 하늘을 나는 새들만 말없이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논픽션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다큐멘터리의 한 토막 같은 이 책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내 아이를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가장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게 요동치는 먹빛 바다 속으로 온몸을 내던지는 아빠 새. 물고기 한 마리를 물고 솟구쳐 올라온다. 성공이다! 하지만 파도는 더욱 거세 보이고, 튀어 오르는 물거품은 날아드는 돌멩이처럼 묵직하게 뚜렷하다. 이때, 이른 성공이 뭔가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새카만 가마우지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든다. 가까스로 가마우지에게서 벗어나니 이번에는 송골매가 공격한다. 놀라 벌어진 입에서 떨어지는 물고기. 아빠 새는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는다.
별다른 극적 설정 없이 바닷새들의 일상적인 한때를 화면에 옮겼지만, 그 화면은 블록버스터 장면 못지않은 긴장감을 준다. 대단히 역동적으로 구사되는 앵글 덕분이다. 물고기를 문 아빠 새를 가마우지들이 뒤쫓고 둘러싸는 장면에서는 속도감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바로 다음, 아빠 새가 한껏 각도를 틀어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은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듯하다. 송골매의 날카로운 눈과 부리를 꼬리 끝에 매단 채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아빠 새의 눈은 결기로 가득하고, 벌린 부리에서는 혀가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나올 듯하다.
이 숨 막히는 장면에 촉촉한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짤막한 텍스트이다. 다급하고 비장한 내레이션이 아니라 천진한 아이의 목소리. 아빠가 무슨 물고기 잡아올까? 아빠다! 아빠! 에이, 아빠 아니네. 엄마, 아빠 보여? 물거품이 터지고 깃털이 흩날리는 전쟁터 같은 생업의 장에서 아빠를 지탱하는 힘은 그 여린 목소리에서 나올 것이다. 되찾은 물고기를 물고 아이를 향해 날아가는 작은 뒷모습에서 비로소 온전한 아빠 새의 존재감이 완성된다. 세상 모든 아빠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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