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고사리 꺾기는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다. 몇 시간을 쭈그린 채 기어 다녀도 허리 다리 아픈 줄 모른다. 고사리 꺾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어 구조대가 출동했다든가, 몇 날 며칠을 종일 밥도 안 먹고 고사리만 찾아다니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근처 식당에 거금을 선불하고는 ‘우리 마누라 잡아다 밥 좀 먹이라’ 부탁했다든가 하는 일화도 흔하다. 고사리 꺾기의 그 가열한 즐거움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집중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서울에서 살지만 해마다 4월이면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작가가 고사리 꺾기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지레 신바람을 내며 책을 펼친다. 그 손끝의 쾌감을 되살려주겠지! 그러나 막상 전개되는 장면은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깊은 숨을 고르게 만든다. 단순하고 부드러운 선과, 칸칸이 나뉜 만화풍 구성이지만 여백 많은 장면들 덕분이다. 나지막한 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에 마음이 풀리고 하늘 넓어 속이 탁 트이는 제주의 정취가 그 안에 오롯이 들어 있다.
엄마와 고사리를 꺾고 말리고 요리해 먹으며 지내는 일주일. 작가는 햇볕에 따뜻이 데워진 돌담 위에 눕기도 하고, 슬렁슬렁 걷다가 홀로 만개해 있는 산벚나무도 만나며 ‘이 좋은 걸 왜 여기 있을 땐 몰랐을까’ 중얼거리기도 한다. ‘너무 많고 너무 빠르고 너무 화려한 서울 생활에 완전히 지쳐버린’ 그가 그렇게 쉬고 난 뒤 다시 기운을 얻는다.
그런 힐링과 함께 또 마음이 푸근해지는 작가의 귀여운 전언이 있다. ‘처음에는 잘 안 보이지만 집중해서 찾다 보면 보이기 시작’하는 고사리. 여기저기 사방에 머리를 돌돌 말고 서 있는 사랑스러운 고사리 같은 것을 서울에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열심이라 빠른 사람들, 하나하나 달라 재미있는 사람들, 화려한 것 사이에 작은 것들’.
고사리 꺾기의 달인 엄마가 일렀듯 ‘이펜이 것도 저펜이 강 사야 봐진다(이쪽 것도 저쪽에 가서 서야 볼 수 있다)’니, 내가 있는 이쪽을 제대로 보려면 저쪽으로 가야 한다. 서울에 있어보니 제주가 제대로 보이고, 제주를 보고 오니 서울이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씩씩하게’ 걷는다. 너무 확확 걷지 않고 발 조꼬띠(옆)도 잘 살피면서. 그러다 뭔가 좋은 것을 발견하면 고사리 가방에 넣는다. 자기처럼 불룩한 고사리 가방 멘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그러니 우리도 가방을 메고 고사리를 찾아 저쪽으로 가볼 일이다. 한번 꺾어보면 멈추지 못할 것이다. 더 크고 통통한 고사리를 찾고 싶으면, 가시덤불 밑으로 기어 들어가거나 말똥더미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책의 고사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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