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경의선에는 항쟁이 흐르고 있었지
  • 김형민 (SBS CNBC PD)
  • 호수 590
  • 승인 2019.01.1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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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동안 생명력을 박탈당한 경의선은 일본의 침략 루트였지만, 나라 잃은 한국인의 투쟁심이 흐른 물길이기도 했다. 미스터리로 남은 황옥이라는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역사상 경부선, 경인선에 이은 세 번째 철도는 무엇일까. 그건 경의선이야.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총연장 518.5㎞의 철도. 경의선 부설권을 처음 따낸 건 프랑스의 피브릴(Fives Lile)이라는 회사였어. 피브릴 사는 서울-의주 철도 노선을 세 번이나 답사했지만 정작 공사에 들어가지는 않았단다. 자본 조달도 여의치 않고 국제 정세도 묘하게 돌아갔기 때문이야.

‘칭다오’ 맥주라고 들어봤지? 칭다오(靑島)는 중국 산둥반도의 항구야. 독일은 1897년 이 칭다오가 포함된 산둥반도 교주만 일대를 점령하고 독일 태평양 함대 기지를 칭다오에 건설했어. 그때 맥주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중국인들이 생산해온 게 칭다오 맥주다. 독일의 교주만 점령은 지척의 만주에 눈독 들이던 러시아를 자극했고, 러시아는 청나라를 압박해 랴오둥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조차해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따냈지. 이건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와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역을 대륙의 끝 한반도에서 확보하려던 러시아의 전략 수정을 의미해. 프랑스 피브릴 사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발맞춰 경의선 부설권을 따낸 것인데, 러시아가 이렇게 되니 세월아 네월아 착공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거야. 우여곡절 끝에 경의철도 부설권은 한국에 돌아왔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자금과 역량이 모두 딸렸단다.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경의선 건설은 국제 정세의 다급한 변화로 급물살을 탔어. 이번에는 일본이었다.

ⓒ연합뉴스일본 군인들이 경의선 공사 현장에 동원돼 일하고 있다.

만주와 연결되는 경의선을 일찍부터 탐내던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군대를 서울에 진입시켜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력화했지. 사실상 서울을 점령한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는데 이 조약의 제4조에 이런 내용이 나와. “대일본 제국 정부는 전(前)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이 ‘군략상 필요한 지점’ 가운데 가장 다급한 것이 경의선 철도였어. 러시아와 전쟁을 하려면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철도가 절실히 필요했으니까. 일본은 경의선 ‘50년 임대’를 강요한 후 부랴부랴 철도를 놓기 시작한다.

1906년 난공사 지역이었던 청천강 철교가 완성되면서 경의선은 733일 만에 그 모습을 온전히 역사에 드러냈단다. 경의선은 일본의 야욕대로 만주를 향하는 침략 루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라 잃은 한국인들의 투쟁심이 면면히 흐른 물길이기도 했어. 안동의 명문 양반가였던 석주 이상룡의 가족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경의선에 몸을 실었고, 경술국치 직후 한국의 민족운동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조작된 105인 사건의 희생자들이 줄줄이 엮여 실려온 것도 경의선 철도였지. 3·1항쟁이 가장 먼저 불을 뿜었던 것은 서울-황해도-평안도를 잇는 경의선 라인이었다.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퍼부었던 의열단원 김익상이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일본 아주머니와 유창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며 가족인 양 위장하여 일본 경찰의 눈을 피했던 것도 경의선 기차 안이었어.

밀정인가, 의열단 동지인가 

슬프고도 험난한 경의선 역사 속에서 떠오르는 인물로 아빠는 황옥(黃鈺)이라는 사람을 들 수 있겠다. 황옥은 일본 경찰에 투신하여 경부(警部)라는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야. 한때 상하이 임시정부에 파견돼 밀정 활동을 한 베테랑 ‘고등계’ 형사였지. 그러나 그의 이후 행적은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어. 황옥은 1923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의 밀명을 받고 한창 의열 투쟁으로 명성이 높던 의열단 내부에 잠입했다. 경찰에서 해고된 실업자 행세를 하며 의열단원 김시현에게 접근했고 황옥과 김시현은 경의선 열차를 타고 만주로 넘어갔지. 여기서 황옥은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났는데 영화 <밀정>에서처럼 김원봉에게 감화된 것인지 아니면 밀정 활동의 일환인지 알 수 없지만, 의열단의 일을 돕기로 해. 의열단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폭탄 36개, 권총 20정 등을 압록강 근처 안동(현재의 중국 단둥)까지는 어찌어찌 옮겨왔지만 조선으로 넘어오지 못하던 무기들을 자신이 들여오겠다고 나섰던 거야.

1923년 ‘황옥 경부 폭탄사건’ 재판에서 황옥(왼쪽)과 김시현이 나란히 앉아 있다.

1923년 3월8일 황옥과 김시현은 공산당원이던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와 함께 <조선일보> 안동지국 설치 축하연을 벌였어. 일본인 관리들과 신의주경찰서 경부보 최두천까지 포함된 거창한 잔치였지. 그들은 압록강 건너 신의주에서 ‘2차’를 하기로 하고 강을 건너왔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자동차로 건너왔지만 황옥과 김시현은 신의주 경찰 최두천을 거느리고 인력거를 타고 왔어. 바로 그 인력거에 폭탄이 잔뜩 실려 있었지. 국경 수비대가 신의주 경찰 간부 최두천을 보고 경례를 올려붙일 지경이었으니 작전은 감쪽같았고, 마침내 조선을 뒤흔들 폭탄들은 경의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옮겨지게 돼.

그런데 또 다른 밀정이 이 사실을 일제 당국에 밀고하고 일본 경찰은 황옥과 김시현을 비롯하여 의열단 조직원들을 굴비 엮듯 체포했지. 이 의열단 사건 재판에서 황옥은 자신이 밀정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도 이 사실을 인정했어. 

그런데 되레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가 그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며 황옥은 의열단 동지라고 강력히 주장했지. 황옥과 함께 일했던 김시현이나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후일 광복회장까지 지낸 유석현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황옥은 밀정이 아니라고 증언했어. 김시현은 폭탄을 들여와 경의선 타고 서울로 오는 과정에서 함께 목숨을 걸었던 황옥을 밀정이라 볼 수 없었을 테고, 황옥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김지섭 역시 후일 ‘황옥 밀정설’을 강력히 부인하는 게 당연했을 거야. 의열단장 김원봉 역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고 했으니 황옥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는다. 6·25 때 납북되면서 그의 비밀 또한 역사 속에 묻혀버렸지. 황옥의 딸이 남긴 한마디가 가장 사실에 근접할 것 같구나. “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정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진정한 생각은 하늘과 땅, 그리고 당신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른다.”

경의선은 지난 70년 동안 그 생명력을 박탈당했지. 시베리아와 중국 대륙으로 향하던 기차는 분단 이후 경기도 문산을 넘어서지 못했고, 경의선 철도는 서울의 교외선으로 전락했으니까. 어쩌면 다시 그 철도가 연결되는 날, 우리는 지금껏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던 스스로의 역사를 새롭게 그리고 반갑게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임진강 다리 건너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치닫고, 압록강변 신의주와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 가슴과 머릿속에 훤히 떠오를 과거가 어디 한둘이겠니. 그날이 빨리 오기를 빌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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