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미국 공사로 파견됐다가 돌아온 이하영이 고종에게 장난감 기차를 바쳤어. 호기심 충만한 임금님은 태엽 장치를 동력으로 하여 쇠줄로 된 궤도를 달리는 장난감 기차에 마음을 빼앗겨버렸지. “오호 신기하도다.” 실제로 철도를 놓는 일에 관심을 보였던 건 외국인들이었어. 미국은 서울의 관문인 인천과 서울을 잇는 경인선 부설에 욕심을 냈고, 조선에 눈독을 들이던 일본인들 역시 호시탐탐 철도 건설을 계획했으니까. 1893년 일본인들은 경부선 철도 노선 측량에 나섰어. 이런 맹랑한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야. “학술적인 일로 조선의 새를 연구하는 것이다. 새 중에서 몇 종을 포획하여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하여 조선의 새를 조류 연구자들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총을 사용하게 되는데, 조선 사람들이 다칠까 봐 접근을 못 하도록 줄을 치는 것이다(〈프레시안〉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4).”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 조선 철도 부설 허락을 처음 따낸 건 미국인 사업가 J. R. 모스였다. 모스는 철도 부설권을 획득할 경우, 왕실에 10만 달러, 그리고 관계 대신들에게 5만 달러를 상납하겠다며 유혹하기도 했다는구나(조성면, 〈철도와 문학〉). 이 수완 좋은 사업가는 고종의 환심을 사서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슬을 얻기도 했고, 우리말에 ‘노다지’라는 단어를 낳았던(금맥이 발견되면 서양인들이 “No touch!”를 부르짖었기에) 평북 운산금광 개발권을 따내기도 했어.

“기차야 기다려라” 외친 학부대신 신기선

ⓒ연합뉴스경인철도가 개통될 당시 운행됐던 기관차.

1896년 3월 모스는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했고 철도 공사에 들어간단다. 모스는 곧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팔아버려.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어쩔 수 없이 팔았다는 사람도 있고, 모스가 한껏 폼을 잡아 경인철도를 목 놓아 탐냈던 일본으로 하여금 애가 타게 만든 뒤 비싼 값에 팔아먹고 튀었다는 주장도 있단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인들은 이 외국인들의 약삭빠른 철도 놀음의 구경꾼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1898년 5월 공사 중이던 경인철도의 권리는 170만2452원75전, 당시 100만 달러에 일본으로 넘어갔고 “철강 1200여 톤, 벽돌 120만 장, 석재 5만 개, 시멘트 5000통, 받침목 3000개, 기타 목재 6000재(材)”를 쏟아부은 후 1899년 9월18일 마침내 개통식을 열어(〈한국철도 100년사〉). 한강철교가 채 지어지지 않아 아직 진정한 ‘서울’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건 거창한 개통식이 이루어지지. 경인철도합자회사 사장이었던 시부자와 에이치는 낭랑한 일본어로 이렇게 연설한다. “철도는 황야를 개척하고 물산을 증식하고 공예를 일으키고 상업을 통하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 대한국과 같이 대륙의 일단을 점하여 해양에 돌출하고 토양이 기름지고 바다와 육지의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정재정, 〈일본의 대한침략정책과 경인철도 부설권의 획득〉).”

이 개통식에는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신기선도 참석했어. 신기선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로서 매관매직에 여념이 없던 고종에게 “만약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실 경우, 간신히 붙어 있는 나라의 명맥은 당장 끊기고 말 것입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한 적이 있는 사람이야.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으로 초대된 이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앞두고 갑자기 사라졌어. 화장실에 간 것이지. 이미 기차는 경적을 울리고 있었단다. 신기선의 부하가 겨우 그를 찾아내 어서 나오라고 채근하자 신기선은 벼락같이 호통을 쳤어.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부하는 애가 탔지.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이러는 사이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 학부대신은 역사적 현장을 놓치고 말았단다(〈경향신문〉 1973년 3월19일). “이리 오너라” 하면 누군가 달려오고 “기다리거라” 하면 사람을 못 박혀 세워둘 수 있었던 봉건의 권력은 그렇게 근대의 ‘쓴맛’을 보았단다. 이 근대의 쓴맛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은 신기선 이외에도 무지하게 많았다.

오늘날 서울 오류동은 인천에서 한양에 이르는 길의 중간쯤에 위치했는데,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고 국영 숙박시설이라 할 원(院)을 비롯해 사람들이 먹고 잘 수 있는 주막거리가 형성돼 있었어. 넉살 좋은 여자를 두고 “오류동 주모냐?”라는 말이 쓰일 정도였다지. 경인철도 개통 후 여행객이 급감하면서 주막거리가 직격탄을 맞았어. 손님 끊긴 주모들이 악에 받쳐 있는데 인근 오류역에서는 기생들을 동원한 호객(呼客) 잔치가 벌어졌다. 마침내 주모들의 분노가 폭발했어. 잔치판에 뛰어들어 기생들 머리채를 휘어잡고 일대 난투극을 벌였지. 또 서울 장안에서는 짚신 장수의 하늘이 무너졌어. 철길 때문에 장사 다 해먹었다 하여 짚신을 정거장 문전에 쌓아놓고 불태우며 ‘아이고 아이고’ 통곡 데모를 했다고 하니까. 또 육로에 비해 발달했던 해운 교통, 즉 한강을 이용해서 인천과 강화로 이어지던 뱃길이 쇠퇴하면서 뱃사공들이 직업을 잃었고, 전국을 누비던 보부상들도 그 기세를 잃어갔단다.

삼 줄기로 꼰 신발 팔아 돈방석에 앉은 김정곤

ⓒ의왕시철도박물관1899년 9월18일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이어지는 경인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낡은 하늘이 무너져도 그 사이의 구멍을 용케 찾아 솟아오르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지. 경인철도가 한창 지어지던 무렵 인천 제물포 부두에는 하역 일꾼 수천명이 들끓었는데 김정곤은 대단한 배짱과 용력으로 그들 사이의 우두머리가 됐어. 어느 날 그는 경인철도를 놓는 노동자들의 신발을 유심히 보게 돼. 중노동을 끝내면 그들의 짚신은 금세 너덜너덜해졌지. 무릎을 친 김정곤은 서울 종로 신발 가게로 달려갔단다. “삼 줄기로 꼰 신을 하루 300켤레씩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질기고 간편한 삼신에 매료된 일꾼들의 매입으로 삽시간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경남도민일보〉 2004년 7월23일).” 경인철도가 제 모습을 갖춰가는 것과 동시에 김정곤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됐어. 

한국 철도의 역사는 슬프고 답답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암울함 속에서 새 빛은 움트는 법이고 앞이 어두워 나뒹구는 비명들 사이에서도 새 길을 찾은 이들의 새된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 법이야. “기차야 기다려라”고 부르짖은 신기선의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물정을 읽고 갈 길을 찾은 김정곤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겠니. 이제 남북을 잇는 철도가 만져질 듯 우리 앞에 왔구나. 경인철도 개통만큼이나 파장이 큰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오늘부터 몇 주간 아빠가 들려줄 ‘철도와 한국인’ 이야기를 들으며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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