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만에 멍때렸다’라는 말을 들었다.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던 중에 한 사람이 얼마 전 보았던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기차에 카메라를 부착해서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을 담아놓은 기록물이라고 했다. 그는 소리도, 자막도 없이 영상으로만 이어지는 그것을 꽤 긴 시간 멍하니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그 순간 시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청각적인 경험을 한 것이었으리라. 휘황찬란한 풍경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음이 소거된 세계를 소리 없이 지켜보면서 그는 자신의 귀가 열리는 신세계를 경험했을 테다. 우리는 소리가 사라진 가운데서 가끔 소리로 인해 놓치고 있던 것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침묵의 말씀’이라 여겼다. 자발적으로 ‘정신을 내보내는’ 경험은 소란스러운 감각을 일시에 차단하는 체험이 아니라 그것을 일시에 전환하는 고요한 체험이다.
멍해져보기가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실험 결과도 있을까.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과연 ‘멍때리기의 놀라운 효과’라는 제목의 글들이 여러 개 보였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게 사과나무 아래에서 ‘멍때렸기’ 때문이라는 얘기, 한 기업의 회장은 매일 한 시간씩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의 창조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는 얘기, 멍때리기가 스트레스 감소와 자신감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는 한 포털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까지 그야말로 정신집중의 효능만큼이나 넋 놓기의 효능도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런 효능을 믿음 삼아 한국에서는 매년 ‘멍때리기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도심 한복판에 멍하니 있는 집단을 등장시켜 바쁜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게 만드는 이 예술 작업은 대회에 참가한 이들을 예술 행위자로 변화시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표현하게 한다. 올해 대회에서 우승한 이는 중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고, 그 학생은 교과서를 집어 던진 후에 스스로 멍해졌다.
넋 놓기 좋은 계절이 온다
우리는 대체로 홀로이고자 할 때 멍해진다. 그러니까 멍해지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나를 그 자체로 생각이라는 물질로 만드는 것. 그게 멍해진 순간이다. 멍때리기 대회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생각하는 사람’ 트로피는 생각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 자체에 대한 응원과 지지인 셈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나로서 내버려두는 행위를 통해 나와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에 있는 가치란 그런 게 아닐까.
최근에 나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부쩍 멍해졌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학창 시절에 ‘여자 같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을 당했던 때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것이 또래들 간에 일어났던 다툼이 아니라 나보다 힘이 더 센 사람에게 당했던 폭력이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 폭력 사건의 테두리에 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우리를 친한 사이로 여(우)겼기 때문이었다. ‘친구들끼리 그럴 수 있지’ ‘친구가 좋아서 장난친 거야’라던 그들의 말은 돌이켜보면 피해자의 말이 아니라 가해자의 말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강요받은 사과의 말, 화해의 말은 실은 피해자의 말이 아니라 가해자의 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른가? 넋 놓기 좋은 계절이 다가온다. 이즈음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을 멍든 상태로 내버려두었던 것일까. ‘침묵의 말씀’에서 해답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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