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생 기혼 여성 동료 지영이 입사 6년차에 대리로 승진했다. 나이, 혼인 여부, 성별, 근속연수가 여전히 환기하는 바가 있는 노동 사회에 우리는 머물고 있다. 맞다. 또 그 얘기다. ‘성별 임금격차’와 ‘일터에서의 성차별’ 그리고 ‘여성 저임금 근로자 비율, 한국이 OECD 회원국 중 최고’라는 사실까지 보태면 완성되는 이맘때(세계 여성의 날)의 오래된 이야기. 새로운 것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나의 동료라는 점이다.

지영은 대학 졸업 직후 지금의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영업자들을 지원하는 관리부서의 정규직 사원이 되었고, 부서 이동을 거쳐 기획·운영팀에서 수년째 근무하고 있다. 지영과 나는 한 팀으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일하고 밥 먹고 때때로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는다. 사적인 얘기라고 해봤자 대체로 어제의 식단과 주말에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이고, 가끔 맞벌이 부부로 사는 일의 고단함이나 직장 내에서 자신의 임무·입지라든가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 자신이 맞닥뜨린 한계와 도전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지영에게서 멈추지 않고 그녀의 친구들로까지 뻗어나갔다. 취업 관문에서부터 존재하는 ‘유리문’이나 입사 후의 ‘유리천장’, 기혼 여성으로서 느끼는 ‘경력단절(육아휴직)’의 불안 등 직장 내 성차별에 관련한 개념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지영의 이야기는 20~30대 여성 노동자들의 ‘가장 평범한 직장생활’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정켈


(직장 내 남성으로부터) 의존적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생수통 갈아 끼우기 노하우를 전수받는, 저임금의 굴레보다 부가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부서의 (대체 가능한) 노동자로 인식되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는 여성의 이야기가, 기혼 가임 여성으로서 출산과 휴직과 퇴직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연봉 협상 불가능 통보를 받았다는 이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럴 때 차별의 경험을 일상적으로 겪지 않는 ‘직장 내 남성’으로서 나를 새삼 돌아보게 됨은 물론이다.

직장에서 여성은 수동적이지 않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늘 말해야 하고 또한 감정적이지 않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늘 말을 줄여야 한다. 사랑받는 아내, 현명한 엄마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은 이 ‘말하지 말고 말하기’라는 딜레마는 나이, 혼인 여부, 성별, 근속연수에 상관없이 남성인 내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불편함은 그렇게 시작부터 불편의 대상을 정해놓기도 한다. 일상에서 점검하고 성찰해야 할 불편한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가 내가 겪는 차별을 가장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길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때와는 다른, 그때보다 나아진, 그때처럼 차별받지 않는다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직장 내 여성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다.

섣부른 반성과 침묵으로 도망가지 않기

작가 은유는 ‘여자는 왜 늘 반성할까’(〈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2019)라는 글에서 “여성의 습관적인 반성과 침묵으로 다져진 성차별의 역사(252쪽)”를 돌아보며 섣부른 반성과 침묵으로 도망가지 않기를 다짐한다. 여성의 주체적인 발화에 관한 이 중대한 선언을 접하고 최근 지영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20대 후반의 기혼 여성 동료에게 활력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그때의 지영은 수동적이지도 의존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았고, 가장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며, 무엇보다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세계에서 한 여성과 함께 살아남고자 분투하는 역동적인 발화자였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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