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선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 김문영 (이숲 편집장)
  • 호수 563
  • 승인 2018.06.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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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뛰어난 그래픽 노블리스트인 지피(본명 잔 알폰소 파치노티)는 <전쟁 이야기를 위한 노트>로 ‘르네 고시니 상’과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최고작품상-황금야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최근 작품 <아들의 땅>은 그래픽과 서사 두 가지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섬뜩하고 놀라운 작품이다. 제목에서도 왠지 성서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서사에서도 역시 여러 차례 성서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개인적으로 영화든 소설이든 설명적이지 않고 스토리를 함축해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의 확장을 일으키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그래픽노블은 내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장르이고, 지피의 이 작품을 단연 최고로 꼽고 싶다.

작품의 배경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야만의 시대, 문명이 사라진 시대이다. <아들의 땅>에 우리가 아는 세상은 더 이상 없다. 모두가 사라지고 일부만이 생존한다. 이 책에는 크게 총 세 부류의 인간 집단이 그려진다. 아버지처럼 이전의 문명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 두 아들과 여자 노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게 된 젊은 세대,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신도들이라 부르는 어떤 집단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과 함께 외롭게, 세상에 대단한 적의를 가진 채 살아간다. 아버지는 이 거친 세상에서 두 아들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글도 가르치지 않고 그 어떤 감정도 가르치지 않은 채 ‘야만적’으로 키울 뿐이다. 자신은 매일 밤 일기장에 무언가를 기록한다. 아버지가 죽어도, 아들들은 그 어떤 슬픔의 감정도 드러내지 못한다(그들에게 감정이란 게 있긴 했을까?). 두 아들은 아버지의 일기장에 어쩌면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일기장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난다.

4032편 가운데 첫손에 꼽힌 작품

“이게 뭐 이래?”라고 단순하게 덮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감정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 아들이 만나는 일종의 모험담과도 같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무엇일까?” “사랑은 타고나는 것일까, 학습되는 것일까?” “인간은 본디 선할까, 악할까?” “언어란 무엇일까?” “타인을 이해하는 수단은 말일까, 행동일까?” 등. 이제 그 해답을 찾아 나서야 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철학적 함의와 다양한 열린 해석으로 가득한 스토리텔링을 도와주는 지피의 그래픽이다. 해칭 기법(판화나 소묘에서 다양한 평행선이나 교차선들을 그려넣어 대상의 음영, 양감, 명암 등을 나타내는 기법)으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한 그의 그래픽은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도우며 독자를 작품 속에 빠져들게 한다. 그는 선 하나로 세상의 밝음과 어둠을, 낮과 밤을, 선과 악을, 사랑과 증오를 표현한다.

매년 프랑스 만화비평가협회는 프랑스어로 발간된 그래픽노블을 대상으로 ACBD 상을 수여한다. 올해 4032편의 신간 경쟁작을 제치고 지피의 <아들의 땅>이 ACBD 최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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