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을 쓰다듬는 순간 취재진의 긴장도 풀렸다
  • 싱가포르/글 김동인·사진 신선영 기자
  • 호수 562
  • 승인 2018.06.2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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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정부인 싱가포르는 기자들의 취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회담 기간 내내 긴박하게 움직여야 했던 취재진은 두 정상이 서로 등을 쓰다듬은 마지막 순간에야 폭소를 터뜨렸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셀카를 찍었다. 배경은 기자들이었다. 6월10일 오후 4시(현지 시각). 한낮 기온은 33℃, 습도 80%를 넘나들었다. 체감기온은 40℃였다. 15분 전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에 입국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오차드 구역 내 세인트리지스 호텔에 도착했다. 기자들이 들어찬 건널목에 그늘은 없었다. 80m 너머 호텔 입구가 보이는 장소는 이곳뿐이라 자리를 지켰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한다는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었다. 기자들은 김정은 위원장을 마냥 기다렸다. 경찰은 인근 도로를 통제했다. 이면도로를 모두 막고, 호텔 정문 앞 4차선 일방통행로는 절반만 열어두었다. 주변 50m 이내 인도는 차단벽을 세워 사람들의 시선을 막았다. 싱가포르 정부가 준비한 삼엄한 경계와 현기증이 일 만큼 낯선 도시의 더위가 호텔 주변을 가득 메웠다.

ⓒ시사IN 신선영6월10일 오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태운 차량이 이스타나 대통령궁으로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 도심 곳곳에 있는 고급 호텔은 주요 ‘서밋 스폿’이었다. 크게 세 구역이 북·미 정상회담의 무대였다. 가장 관심이 집중된 곳은 두 정상이 머문 오차드 구역이었다. 고급 호텔과 쇼핑몰이 밀집한 지역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표단은 막판까지 회담 장소 후보로 고려했던 샹그릴라 호텔에 머물렀다. 김정은 위원장과 그 일행은 세인트리지스 호텔에 머물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머무는 샹그릴라 호텔에서 직선거리로 500m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두 정상의 일거수일투족을 담기 위해, 수많은 기자들이 이 지역의 주요 길목을 지켰다.

두 번째 스폿은 정상회담이 열리는 센토사 섬이다. 센토사 섬은 그 자체로 요새다. 이 섬과 싱가포르 시내를 연결하는 다리는 ‘센토사 게이트웨이’ 하나뿐이다. 센토사 섬 중앙부에는 거대한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숲 한가운데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카펠라 호텔이 있다. 주변에 고층빌딩 하나 없는 숨겨진 명소였다.

ⓒ시사IN 신선영싱가포르 센토사 섬에서 회담을 마친 김정은 위원장의 차량이 센토사 게이트웨이를 빠져나오고 있다.

양국의 정상회담 실무진은 주로 도심 한가운데인 ‘다운타운 코어’ 지역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실무진들은 정상회담 전날인 6월11일 밤까지 다운타운 코어에 위치한 리츠칼튼 호텔에서 협상을 이어갔다. 북한 측에서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미국 측에서는 성 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가 실무회담을 이끌었다. 언론과 정부기관의 임시 시설도 인근에 마련됐다. 한국 정부는 스위소텔 더 스탬퍼드 호텔에, 미국 정부는 JW 메리어트 호텔에 각각 기자회견장을 차렸다. 싱가포르 정부가 대대적으로 준비한 국제미디어센터(IMC)도 멀지 않은 곳에 들어섰다.

2500여 명에 이르는 전 세계 언론인들은 짧게는 사나흘간, 길게는 한 달 넘게 싱가포르를 배회했다. 권위주의 정부로 유명한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취재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6월10일부터 14일까지 두 정상이 머무르는 오차드 구역과 회담이 열리는 센토사 섬을 특별행사구역으로 지정했다. 외부인이 자유롭게 통행하기 어려웠고, 드론을 띄우는 것도 금지됐다.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담을 포인트도 마땅치 않았다. 싱가포르에 미리 상주해 있던 일부 언론인들은 금지구역에서 취재를 하다 구금되기도 했다.

6월10일 오전 10시 IMC 개장

본격적인 취재 경쟁은 6월10일 오전 10시, 싱가포르 정부가 마련한 IMC가 개장하면서 시작됐다. ‘F1 핏(pit) 빌딩’이라 불리는 이곳은 원래 인기 레이싱 스포츠인 ‘포뮬러원(Formula 1)’ 경기가 열리는 행사장이다. 레이싱 도중 타이어를 교체하는 ‘핏(pit) 작업’을 위해 만든 건물로 전체 길이만 300m가 넘는다. 10열로 늘어선 긴 책상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시사IN 신선영
ⓒ시사IN 신선영이스타나 대통령궁 주변(위)과 세인트리지스 호텔 주변(아래)은 각국 취재진과
싱가포르 현지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 개장과 함께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던 주요 외신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주요 이해 당사자인 한국·미국·중국·일본 기자 외에도 다양한 국가에서 싱가포르에 기자단을 파견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일본 NHK 방송이 단일 언론사로는 가장 많은, 약 100명을 싱가포르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IMC는 취재 현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편의시설에 가까웠다. 남북 정상회담 당시 정부 공식 브리핑이 열린 일산 킨텍스와 달리, 이곳에는 별도 기자회견장이 없었다. 취재할 만한 북·미 관계자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IMC는 언론통제 국가 싱가포르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IMC는 현지 방송사인 미디어코프(Mediacorp)와 싱가포르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거대 미디어 기업 SPH(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의 홍보 장소였다. 현지에 도착한 많은 기자들은 싱가포르 최대 일간지이자 SPH 산하 대표 신문인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속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IMC가 제공한 인터넷 망은 빠르고 편리했지만, 트위터·다음·MSN 등 일부 사이트를 차단하기도 했다. IMC의 정식 공지 사항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서만 제공됐다. 이마저도 내용의 절반은 자국 리셴룽 총리와 정부의 성과를 발표하는 메시지였다.

6월10일 오후 3시 김정은 국무위원장 싱가포르 도착


북·미 정상회담의 공식 일정은 6월12일 하루였지만, 분위기는 6월10일부터 무르익었다. 두 정상이 같은 날 싱가포르에 도착하면서 시작을 알렸다. 일찌감치 IMC에 모인 기자들은 6월10일 점심 무렵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탄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기가 곧 도착한다는 정보가 돌았다. 일부는 싱가포르 창이 공항으로 향했다. 김 위원장이 리셴룽 총리와 회담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다수가 이스타나 대통령궁을 예상했다. 평소에는 언론의 취재가 불가능한, 상시 경계가 삼엄한 지역으로 스마트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통제구역이다. 이스타나 궁 인근에 외신기자들이 모여들자 싱가포르 정부는 이례적으로 사진과 영상 촬영을 허가했다. 기자들이 모여들자 시민들도 하나둘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김정은 위원장은 호텔로 향했다. 오후 6시, 한 벤츠 차량이 호텔을 나서자, 차를 둘러싼 북한 경호원들의 ‘질주’도 시작됐다. 김 위원장이 탄 자동차가 오후 6시30분경 이스타나 대통령궁에 도착하자, 싱가포르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6월10일 오후 8시30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싱가포르 도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날 밤 8시30분쯤 싱가포르 파야레바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서 내리는 동안 싱가포르 외교장관 비비안 발라크리쉬난이 트럼프 대통령을 마중했다. 두 정상의 주요 일정마다 함께한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이번 회담 기간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6월11일에는 김정은 위원장과 셀카를 찍으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숙소인 샹그릴라 호텔로 향했다.

6월11일 저녁 기대했던 두 정상 간 사전 만찬 열리지 않아

6월11일은 비교적 조용히 흘러갔다. 두 정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가 관심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정대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 오찬 회담을 진행했다. 이스타나 대통령궁으로 이동하는 동안 현지 언론은 주요 도로 통제구역을 실시간으로 알렸다. 싱가포르 시민들은 통제된 도로 인근에 늘어서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동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반면 김정은 위원장의 움직임은 따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사전 회담 격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만찬을 하리라는 예상도 흘러나왔다. 일부 기자들은 종일 세인트리지스 호텔 앞에서 대기했지만, 기대했던 ‘사전 만남’은 없었다. 다만 저녁 9시, 김정은 위원장은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을 방문하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이날 밤 ‘깜짝 관광’에 나선 김 위원장은 전망대와 식물원, 오페라하우스 등을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도 6월11일 싱가포르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남관표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을 비롯해 일부 정부 인사들이 현지에서 북·미 정상회담의 추이를 지켜봤다. 이날 오후 청와대 관계자는 “진지한 대화 파트너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 북한으로서는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인 것 같다. (북·미 실무협상이 정상회담 전날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실무 차원에서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는 그렇게 걱정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를 찾은 청와대 관계자들은 어디까지나 이 회담의 주인공이 미국과 북한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기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입장이란 걸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6월12일 오전 9시 두 정상 악수를 나누다

ⓒAFP PHOTO6월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기 위해 서로에게 다가서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 당일인 6월12일 아침, IMC에는 일찍부터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센토사 섬으로 향하는 북·미 양국 대표단의 이동 모습이 생중계됐다. 선별된 일부 ‘풀 기자단’을 제외하면 기자들 대부분이 IMC에서 회담 상황을 지켜봤다. 오전 9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를 나누는 순간 IMC에 모인 기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촬영하며 흥미롭게 두 정상의 만남을 지켜봤다. 환호성이나 박수가 크게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이 틀어지면 곧바로 회담장을 나서겠다고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후 1시40분, 두 정상은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누며 정상회담을 마무리했다. 이때까지 IMC에 모인 기자들은 공동성명에 어떤 문구가 들어갈지 궁금해하며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지켜봤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후 4시에 자신이 기자회견을 직접 할 것이라며, 곧 공동성명이 기자들에게도 제공될 것이라고 알렸다.

진지하게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두 정상이 뒤돌아 나가는 순간에야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마지막 악수를 마치고 뒤돌아 나가는 순간,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등을 쓰다듬자 IMC에 모인 모든 기자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몇 초 후, 트럼프 대통령도 김 위원장의 등을 쓰다듬자 미소는 폭소로 바뀌었다. 기 싸움에서 지기 싫어하는, 두 정상의 다소 어색한 몸짓이 IMC를 감돌던 긴장감을 녹였다.

ⓒ시사IN 신선영북·미 정상이 만나는 순간 국제미디어센터(IMC)에 모인 각국 취재진이
천장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회담 장면을 일제히 찍고 있다.

회담이 이어지는 동안, IMC 앞에는 붉은색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백악관은 일부 언론사를 선별해 회담이 열린 카펠라 호텔로 초청했다. 기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기다리는 동안 김정은 위원장이 먼저 센토사 섬을 떠났다. “여러분도 곧 공동성명을 보게 될 것이다”라던 트럼프 대통령의 말과 달리, 공동성명은 따로 제공되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일부 기자들은 현장 사진을 자세히 확대해 공동성명을 판독했다. 일부 기자들은 “CVID가 없다”라고 말했다.

6월12일 오후 4시 트럼프 대통령 기자회견

트럼프 대통령이 주재하는 기자회견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여줬다는 ‘영상’이 소개되었다. 한국어가 아닌 북한 문화어로 섬세하게 만든 영상에서, 미국 측은 ‘미래와 번영’을 강조했다. 기자회견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질문에 직접 답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 한국 정부의 발표도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문재인 대통령의 성명을 한국어로 발표했고, 싱가포르에서는 남관표 제2차장이 같은 성명서를 영어로 발표했다. 질의응답이나 백브리핑은 없었다.

프롤로그는 길었지만, 에필로그는 짧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곧바로 출국길에 나섰다. 이후 대부분의 언론이 세인트리지스 호텔 앞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출발을 기다렸다. 밤 10시25분, 북한 대표단을 태운 차량이 호텔을 나섰다. 싱가포르 시민들은 떠나는 김 위원장과 북한 대표단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흰색 버스에 탑승한 일부 북한 수행원들이 싱가포르 시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밤 10시40분, 드디어 세인트리지스 호텔 인근의 차량 통제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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