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는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와 더불어 올 한 해 가장 놀라운 데뷔작으로 기억될 만한 영화다. 내내 재치 있되 캐릭터 개개인에게 고루 사려 깊은, 보기 드문 순발력으로 충만하다. 영화가 끝나고 홍당무 양미숙(공효진·사진)에게 연민이든 사랑이든 따뜻한 감정을 품지 않고 극장을 나서기란 좀체 불가능하다. 미래의 양미숙이 좀더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이길 손 모아 고대하게 될 만큼. 그렇게 끝내 마음이 가고야 마는 것이다. 영화 다 보고 이런 대화 나눈 사람들 적지 않을 터이다. 그래서 양미숙은 잘살았을까? 잘살았겠지. 잘살았으면 좋겠어.

양미숙은 뜨거운 사람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싶어서 뜨거워진다. 멋지고 그럴싸한 뜨거움은 아니다. 찌질하고 못생긴 뜨거움이다. 그럼에도 양미숙은 그걸 감출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럴 능력이 없다. 이 지점에서 양미숙이 앓는 안면홍조증이라는 질병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속내를 감추거나 가장할 수 없으니, 감정이고 욕망이고 모두 솔직하게 드러내버리는 것이다. 단지 드러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양미숙의 희소성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게 참 좋았다. 모두가 쿨하고 싶어하는 시대다. 이 나라가 쿨 에너지로 움직인다고 역설하는 학자도 있지 않는가. 속내를 그럴싸하게 감춰 태연하고 냉정하게 행동할수록 사회물 잘 먹은 어른이라고 평가받는 세상이다. 꽁꽁 싸매 잘 감추고 짙은 화장술로 덮어낼수록 그(녀)의 시장가치는 상한가를 친다.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는 모습은 평가절하된다. 누군가의 절박함은 한줌의 실소로 무마되기 일쑤다. 이 안에서 ‘아이고 난 내가 창피해’라고 솔직하게 칭얼거렸을 때, 사랑받고 싶어서 노골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 광경은 하나의 파격이 된다. 양미숙이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그런 환기와 파격을 끊임없이 안겨준다.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이 환기는 웃음으로 호감으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가 양미숙처럼 살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사람을 가려내 인정하고 아낄 수 있는 눈 정도는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기자명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