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반 작업에만 1년 반이 걸렸다. 체력과 정신이 모두 지쳐 있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우연히 자신의 ‘싸이월드’ 일기를 보았다며 8년 전부터 책을 내자고 제안했던 출판사 관계자에게 연락했다. “아직도 그 제안이 유효하다면 합시다!” 그때의 심정은 이런 거였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다고 평생을 바치는 게 지겨웠다. 뭔가 내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이후 8년 만의 차기작 〈비밀은 없다〉가 개봉했고 ‘생각보다 영화가 너무 망해서’ 책 쓰는 일이 위로가 되었다. 7월25일 절친한 이해영 감독의 사회로 진행된 북토크 행사에서 이경미 영화감독이 밝힌, 에세이집 〈잘돼가? 무엇이든〉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행사 전 만난 이경미 감독은 ‘영화가 망했다’는 말을 한 시간 동안 10번은 했다. 2008년 개봉된 그의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는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기는 데 그쳤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평생 ‘삽질’을 일삼는 교사 양미숙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캐릭터였다. 이 감독은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2016년, 8년 만에 개봉한 〈비밀은 없다〉는 당선이 유력한 국회의원 후보 남편을 둔 연홍이 사라진 딸을 찾아 추적하는 내용이다. 전작처럼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등장으로 평단의 지지를 받고 상도 받았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애초 충분히 평가받을 기회도 없었다. 개봉 첫 주말부터 ‘퐁당퐁당 상영(한 상영관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교차 상영)’이 시작됐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지고 망했으면 또 달랐을 텐데 그럴 기회 없이 금방 망해버려서 뭔가 해소할 게 필요했다. 책이 아니었다면 스포츠 자격증을 딴다든지 해외에 나가 요리를 배운다든지 했을 것 같다.”

ⓒ시사IN 윤무영이경미 감독은 “‘생각보다 영화가 너무 망해서’ 책 쓰는 일이 위로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살면서 계획 없이 저지른 결정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영화고 하나는 책이었다. 영화는 ‘지겨운 직장 생활의 작은 이벤트 삼아 영화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던’ 게 시작이었다. 책은 영화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보다는 마음이 가벼웠다. 그땐 영화밖에 없었는데 이젠 책이 잘 안 되더라도 영화가 있다.

걱정은 있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덜해지면 어떻게 하지?’ 영화에 편견이 생길까 봐 우려스러웠다. 이 감독의 한국예술종합대학 졸업 작품과 같은 제목의 이번 책에는 지난 15년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해영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노필터·무보정의 이경미가 드러난’ 글이다. 과거의 일기와 새로 쓴 에세이를 묶었다. 중심은 당연히 영화다. 차기작을 준비하는 동안 겪은 불면증 등 각종 안간힘이 눈물겹다가도 엉뚱한 발상에 자주 웃음이 난다. ‘잘돼가느냐’는 질문 속에는 위로가 담겨 있다.  

ⓒ이경아 작가 제공〈잘돼가? 무엇이든〉에 나오는 일러스트는
동생 이경아 작가가 담당했다.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책에는 특히 〈비밀은 없다〉의 ‘형편없는 스코어’가 남긴 갖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만들어지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개봉 후에 맞은 운명도 한 편의 영화였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관객들 요청으로 재개봉이 이루어졌다. 〈미쓰 홍당무〉가 이 감독에게 좋은 감정을 줬다면, 〈비밀은 없다〉는 복잡한 감정을 안겼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쁜 게 있을 때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건 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준 영화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운이 좋은 편이다.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 감독의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지만 강력한 지지자들이 있다. “망했다는 진담을 농담처럼 할 수 있는 것도 살 만하니까 그런 거다”라고 덤덤한 말투로 덧붙였다.

30대 초반, 서울 종로에서 길거리 사주를 보다 ‘낫 들고 갈대밭 베는 팔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 일화가 담긴 글에는 그의 20대 직장 생활이 들어 있다. 1년에 3박4일 휴가가 전부고 신년마다 한복을 입고 회장에게 절해야 하는, 영화와는 상관없는 기업이었다. 거기서 이 감독은 3년 넘게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처럼 부당하다고 느낄 때 목소리를 내면 도와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내가 무지하기도 했다. 시스템에 적응해야만 했고 적응을 못하더라도 하는 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상사를 〈미쓰 홍당무〉 촬영 때 다시 만났다. 한 레지던스 호텔을 촬영 장소로 예약했는데 투숙객이 체크아웃을 거부해 일정이 꼬였다. 문제의 투숙객이 그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기가 막혔다. 재회의 순간, 복수는커녕 그에게 사정사정했다. ‘갈대밭 베는 팔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감독뿐 아니라 여성 독자라면 공감할 만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경미 감독은 한때 냉면집에서 비빔냉면에 딸려 나오는 육수 주전자를 보고 ‘왜 나는 물을 안 주지’ 오해하기도 했다. 마침 김치찌개 집에서도 같은 일을 겪은 터라 ‘내가 여자라서 그런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일이 잘 풀릴 때는 괜찮은데 안 풀리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망하고’ 한동안 그랬다. 영화판에서 여성 감독으로서 비슷한 생각을 할 때는 없었을까. “보이지 않는 거라서 확인할 길이 없다. 왜 여자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들이 투자가 안 되는지. 시나리오가 별로여서 그런지, 아니면 여자가 주인공이고 여자 감독이라 그런지. 통계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지만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통계로 봤을 때 우리는 비교적 어려운 상황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거?”

이 감독은 짝사랑하던 유부남이 젊은 여자랑 바람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쓴 이야기가 〈미쓰 홍당무〉였다는 사실을 책에서 밝힌다. 그의 표현대로 ‘속상한 마음으로 내가 나를 가지고, 나를 웃겨서, 내가 위로받은 영화’다. 그렇게 그의 영화 속 캐릭터에는 감독 자신이 녹아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이 그렇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감독 스스로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그걸 피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탐구한다. 자연스럽게 감독의 관심사가 인물에게 들어간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지? 그렇지만 이런 면도 있어. 그래도 좀 괜찮지 않니?’ 하는 생각으로 그린다. 그렇게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에게도 모성애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비밀은 없다〉의 연홍을 만들었다.

어느 날의 일기는 14년 차이를 두고 정반대로 쓰인다. 2004년에는 ‘영화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머리지만 영화를 완성시키는 건 마음이다’라고 썼다가 2018년에는 그 반대로 썼다. “영화 하나를 만들기 위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정말 많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고 그러려면 전략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작업하며 느끼고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의 영화에 대한 악담을 찾아 읽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전후 글까지 찾아 읽는다는 대목에서는 감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빨리 단련시켜서 담대해지려고 그랬지만 단련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이제 안 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이트’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긴 했다.  

책의 일러스트는 동생인 이경아 작가가 담당했다. 요가에 심취한 이 감독, 원적외선 반신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 감독 등 실제 가장 근거리에서 그를 봐온 동생의 그림은 문체와 썩 잘 어울린다. 동생뿐 아니라 다른 가족도 자주 등장한다. 이름이 나오는 친구들에게는 모두 허락을 받았지만 가족들은 너무 많이 나와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가족을 등쳐먹으면서 살겠다고 하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겠지’라는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까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감독이 아버지에게서 온 문자를 읽어주었다. 책을 읽고 남긴 소감이다. “교과서적인 에세이 형식을 파괴한 매력적인 형식이 신선했다.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문득 냉소적인 너의 인생관을 읽을 수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어딘지 기시감이 들었는데 이경미 감독의 글과 말투와도 닮아 있었다. 강한 정신력과 오기 등을 물려준 아버지는 23년간 KBS 〈동물의 세계〉 내레이션을 한 성우이자 연극 연출가다. 절대 칭찬하는 법이 없어서 〈미쓰 홍당무〉 때도 “예술은 아름다워야 하는데 너는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다가 〈비밀은 없다〉 때부터 칭찬을 해 좀 불안해졌다. 어느 날 일기에는 취한 아버지가 ‘나는 네가 형편없는 놈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다 괜찮다’라고 한 말을 기록해놓았다. 직접적인 칭찬은 난생처음이었다.

이 감독의 어머니는 딸에게 ‘자기 관리’를 강조하고 ‘반듯한 자세’를 주문한다. 문자로 폭력배들의 신종 범죄기술을 알려주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는 범죄 사건을 많이 공유했다. 밥 먹을 때마다 그날의 사건사고를 얘기해주었다. 그 영향으로 이 감독은 겁이 많다.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경계하는 마음은 창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 어머니가 ‘다음 영화는 사람들이 많이 좋아할 수 있는 순한 걸로 만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한다는 대목에선 느닷없이 코끝이 찡해진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만 ‘순한’ 건 잘 모르겠고, 어머니한테는 미안하다.

이 감독은 ‘인생의 첫 흥행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결혼식이었다’고 밝힌다. 지난 3월 결혼한 그가 어쩌다 ‘무서워하던’ 백인과 만나게 되었는지도 소개한다. 30대 후반의 실연 이후 ‘자웅동체 아메바’처럼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준비가 다 되었을 때 남편을 만났다.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던 영화 기자였다. 결혼식은 많은 친구들에게 축복을 받으며 해야 한다는 남편의 지론에 따라 신혼여행도 생략하고 의미 있는 예식과 밤샘 파티를 준비했다. 그렇게, 탕웨이와 결혼한 김태용 감독에 이어 다문화 가정의 삶에 입성한 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의 고단함을 알았다. 남편은 성실한 직장인이지만 신용카드 발급이 안 되었다. 은행에서 상담을 받다 화가 나 카드를 다 없애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걸.

60세쯤 되면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

책에는 박찬욱 감독의 이름도 자주 보인다. 이경미 감독은 박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제3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잘돼가? 무엇이든〉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미쓰 홍당무〉는 박 감독이 제작했다. 영화 인생에서 고비마다 도움을 받았다. 이경미 감독에게 박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살면서 평생의 은인을 만나는 카드가 사람들에게 하나씩 다 주어진다면 나의 카드는 박 감독이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언젠가 내가 힘이 생겨서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기쁠 것 같다.” 동료 감독들에 대한 애정도 글마다 묻어난다. 무엇보다 서로의 취향을 나누는 게 큰 힘이 된다. 서로의 특이한 점을 관대하게 이해해주는 면도 있다.

이번 책을 만들며 그런 바람이 있었다. 영화를 계속 만들겠지만 체력이 좀 필요한 일이라, 나이가 많이 들면 하기 힘들 것 같다. 60세쯤 되면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 그때를 염두에 두고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썼다. 차기작은 영화나 드라마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영화로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공포 판타지 계열의 〈새색시〉. 자신의 결혼식 날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생각한 아이템이다. 드라마는 스릴러 장르고, 원작이 있다. 무엇이든 내후년에는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바람처럼 순한 영화가 될 확률은 낮지만, 다행스러운 건 이 감독의 우려와 달리 책을 읽고 난 뒤에 차기작이 더욱 궁금해진다는 점이다. ‘잘 돼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가고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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