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진앙은 선진국인데도 먼저 지축이 흔들리는 것은 신흥 경제국이다. 주로 대외 무역의존도가 높거나 금융 비중이 큰 나라가 직격탄을 맞았다. 첫 번째 희생자는 유럽의 ‘금융 강국’으로 꼽히던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뒤를 이어 우크라이나·헝가리·벨로루시·파키스탄이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다.

이후에도 서구 언론과 금융기업은 다투어 다음 희생자 찾기에 골몰한다. 이들은 동유럽과 독립국가연합·아시아·남미 등에서 10여 개 나라를 고위험군 국가로 지목했다. 동유럽에서는 발틱3국(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과 불가리아·세르비아 같은 옛 사회주의권 나라가,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칠레·에콰도르·멕시코 등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베트남 등이 거론된다.

이들이 고위험군 나라로 지목되는 데는 물론 근거가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신흥국에 대한 부도 염려가 높아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 나라는 대부분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돼왔고, 이를 해외자본 유입을 통해 메워왔다. 그러나 글로벌 신용위기 상황에서는 이 구조가 깨진다. 외환보유액이 매우 적은 상황에서 유입된 돈마저 대거 빠져나간다. 그러니 외채 상환이 불가능하리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테러나 선거 등으로 인한 정치·사회 불안 요인이 가세해 위기를 증폭시킨다.

내수 시장이 큰 나라는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비켜나 있다. ‘브릭스’ 국가(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가 좋은 예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이자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7000억 달러)과 유럽(1조9600억 달러)의 경우도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홍역을 치르지만, 경제력이 약한 나라를 희생양으로 삼는 데 성공한 듯하다. ‘배타적 국제 공조’에 대한 비난 목소리가 높기는 하지만 말이다.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나라가 늘고 있는 것은 대외 의존형 경제구조의 위험성을 웅변한다. 개방을 요구하는 세계화 담론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면 금융위기에 취약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최윤재 교수의 특별기고를 싣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아울러 세계 석학들이 보는 금융위기 해법을 게재한다.


 

ⓒReuters=Newsis‘금융 강국’ 모델로 평가받던 아이슬란드는 과도한 외채로 인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아이슬란드
인구는 겨우 32만명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1위, 1인당 국민소득 세계 5위인 강소국으로 승승장구하던 아이슬란드가 순식간에 국가 부도로 내몰린 것은 지나치게 금융업에 의존한 경제구조 탓이다.
경제 규모(GDP)가 140억 달러인 이 나라 은행권의 해외 채무 규모는 GDP의 7배에 달하는 1000억 달러가 넘지만, 외환보유액은 60억 달러에 불과하다.
아이슬란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증권시장과 은행 관련 규제를 풀어 금융산업을 집중 육성했다. 해외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2004년 5%대였던 정책 금리를 15.5%까지 끌어올렸다. 그 덕에 ‘캐리 트레이드(저금리 국가의 통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에 투자하는 것)’ 자금이 아이슬란드로 몰려들었다. 이 돈은 고성장을 누리는 발판이 되었지만, 금융위기 조짐이 일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외국 자본의 엑소더스로 크로나화 가치는 9월 이후 30% 이상 떨어졌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1~3위 은행인 카우프싱, 란즈방키, 글리트니르를 리시버(일종의 법정관리 제도)에 넣는 등 파국을 피하기 위해 부심했으나 결국 IMF행을 결정했다(60억 달러 규모).

우크라이나
IMF에 구제금융을 가장 먼저 신청한 곳은 아이슬란드이지만, 첫 수혜자는 우크라이나가 될 전망이다. 140억 달러라는 구제금융 규모를 놓고 IMF와 협상 중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은행 시스템에 대한 불안이 높아지면서 10월 들어서만도 13억 달러가 넘는 예금 인출 사태가 일어났다. 흐리브나화 가치도 이달 들어 유로화에 대해 20% 가까이 추락했다.정부는 긴급 자금을 투입해 예금 인출 기간을 정하고 보증한도를 높이는 등 ‘뱅크런’을 막기 위해 부심했으나 국가 부도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위기의 조짐은 경상수지가 매우 악화하리라는 전망에서 비롯했다. 철강 가격이 떨어지고 천연가스 가격은 올랐으며, 외국인 투자자금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 불안이 경제위기를 가중시켰다. 친서방 정권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경제 보복이 벌어지고,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조기 총선(12월7일)을 치르게 되는 등 정치 불안이 커져 가뜩이나 금융위기에 요동치는 경제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헝가리
헝가리가 급기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유로권은 아니지만 유럽 경제에 미칠 파장을 걱정해 유럽중앙은행(ECB)이 50억 유로의 유동성을 제공하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으로 위기의 불길을 끄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동유럽에서 부유한 나라에 속하는 헝가리가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한 것은 외채의존도가 경제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헝가리는 지난해 외채 규모가 GDP 대비 54%로 급증했다. 외환보유액도 170억 유로에 불과하다. 앞으로 1년 동안 270억 유로에 이르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라도 IMF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글로벌 신용 경색이 빚어지면서 통화 가치도 급락했다. 포린트화의 유로화 대비 환율이 지난 8월 말 이후 17% 이상 올랐다. 중앙은행은 포린트화 가치 폭락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 8.5%에서 11.5%로 높였다. 헝가리는 지난 수년간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 적자를 성공적으로 줄여오면서 경제 안정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지만 미국발 금융위기에 맥없이 무너졌다.

벨로루시
벨로루시가 10월22일(현지 시각) IMF에 20억 달러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우리에게는 낯선 나라인 벨로루시는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옛 소련 연방에서 분리된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다. 인구 960만명에 알렉산더 루카셴코가 14년째 집권 중인, 유럽에서 마지막 남은 독재국가다.
석유 수출국인 벨로루시는 최근 유가 하락에 따른 수입 감소로 외환보유량(IMF 발표 42억 달러)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미 금융위기로 수입대금조차 정상 결제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벨로루시가 외환위기를 타개하려면 60억 달러가 필요하리라 추산된다. IMF 외에도 러시아가 20억 달러를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AP PhotoIMF행을 결정한 파키스탄은 지난 1년간 외환보유고가 75%(현재 43억 달러)나 급감했다.

파키스탄
네 번째로 IMF행을 결정한 비운의 주인공은 파키스탄이다. 이 나라는 금융위기와 정정 불안이 겹치면서 외환보유고가 지난 1년간 180억 달러에서 43억 달러로 무려 75%나 줄었다. 두 달여 무역액도 결제하지 못할 지경이다. 파키스탄은 앞으로 1년간 만기가 도래하는 외채 규모가 37억3000만 달러나 되는데, 외환보유액이 급감하면서 외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염려를 낳았다. 수입증가율이 수출증가율을 웃돌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불어났고, 이것이 재정 적자로 이어져 불안감을 키웠다. 자살폭탄 테러가 증가하는 등 사회불안 요소도 투자 심리를 악화시켰다.
“파키스탄의 경제적 안정과 금융 시스템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금융 지원 프로그램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성명을 낸 IMF는 앞으로 3년간 적어도 100억~150억 달러가 필요하리라 예상한다. IMF행에 앞서 파키스탄 정부는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5억 달러를 대출받았고 세계은행(IBRD)에서도 앞으로 9개월 동안 14억 달러 규모를 지원받을 예정이다.

 

 

 

 

ⓒAP Photo아르헨티나 정부의 민간 연금펀드 국유화 소식에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이번에도 IMF 신세를 진다면 재범이 된다. 2001년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며 구제금융을 받은 적이 있다. 10월21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금융위기로부터 펀드 가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290억 달러어치 민간 연금펀드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정부가 연금펀드를 팔아 부채를 갚을까봐 더 걱정이다. 의회는 펀드 국유화를 막겠다는 방침이다. 금융위기 해법을 둘러싸고 갈등이 커지는 와중에 주식시장은 연일 10% 이상 폭락했다. 10월22일 11%, 23일 10%가 떨어졌는데, 22일 장중에는 18%까지 하락해 1990년 이래 최악의 폭락 장세를 연출했다. 아르헨티나아는 경상수지가 소폭 흑자여서 양호한 수준이지만, 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은 올해 9.1%에 이르리라 보인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2004년 유럽연합(EU) 가입 이후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증하면서 연 7~10%의 고성장을 유지하던 발틱 3국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덴마크 금융기업 단스케방크는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세 나라를 ‘국가 부도 고위험 15개국’에 포함시켰다.
‘발틱 호랑이’ 세 나라가 국가 부도 위험에 내몰린 것은 과도한 빚 때문이다. 대외채무 규모가 국내총생산(GDP)과 거의 맞먹는다. 원자재 값 상승으로 경상수지 적자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 안팎을 오르내리고, 외환보유액은 겨우 30억∼70억 달러이다. 국가 부도가 일어날 삼박자를 두루 갖춘 셈이다. 여기에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를 훌쩍 넘었고 주식시장은 곤두박질하고 있으며 통화가치(에스토리아 크룬, 라트비아 라트, 리투아니아 리타스)도 급락했다. 용케 국가 부도를 피한다 해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며 적어도 2010년 이후에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리투아니아는 두 나라에 비해 성장률 하락은 덜한 편이지만, 극심한 주택시장 침체는 엇비슷할 전망이다.

불가리아
동유럽 나라가 미국발 금융위기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위기에 취약한 경제구조 탓이다. 과도한 대외 부채와 경상수지 적자, 외환유동성 부족 등이 그 원인인데 불가리아도 마찬가지다. 신용평가 회사인 피치는 올해 불가리아의 경상수지 적자 폭이 GDP 대비 25%에 달하리라고 내다봤다. 대외 채무 비율은 거의 GDP 대비 100%에 이른다. 동유럽 국가의 주요 자금원이 서유럽 은행들이라는 점에서 서유럽의 신용 경색이 동유럽의 위기를 가중시킬 수도 있다.

카자흐스탄
최근 한 달 새 카자흐스탄의 국가 부도 위험지수(CDS)가 4배 이상 올랐다(1041. 7bp). 레버리지가 높은 은행 시스템과 대외 차입 의존도가 높은 금융구조 때문이다.
그동안 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고공비행으로 다른 신흥국에 비해 주가상승률이 높았지만 이에 따른 수혜는 오래가지 않았다.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금리 인하 조처로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는 와중에 금융위기가 덮치면서 유동성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 최근 캐나다 금융회사인 RBC로부터 아이슬란드에 이어 ‘위험한 국가’군에 꼽혔다.

터키
신용위기 확산으로 외국인 투자자 이탈이 많아지자 리라화가 10월 들어 달러화 대비 30% 폭락하는 초약세를 보였다. 터키 정부는 2001년 IMF로부터 1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뒤 IMF 관리 아래 경제개혁을 추진해왔는데, 최근 들어 경상수지 적자 폭이 커지면서 추가로 대기융자 여부를 검토하는 중이다. 실업률은 9월 기준 9%로 급증했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바크리 그룹이 파산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바크리 그룹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말까지 12억 달러어치의 자산을 매각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는 채권시장이 상당 부분 해외 자본에 노출돼 있어 외국인 투자자의 상황 변화에 민감하다. 10월13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은행예금 보장 한도를 높였고 세계은행과 대기융자 협상을 진행 중인데 19억 달러를 융자받을 수 있으리라 보인다.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석유 수출이 많은 인도네시아는 경상수지가 나빠질 가능성이 적다. 외환보유액도 넉넉한 편이다.

 

 

기자명 박형숙·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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