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이 자리에서 〈에코랄리아스〉에 대해 얘기하며, 저자의 박학이 놀라웠다고 했지? 확실히 어떤 책들은 단순한 박학만으로도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에코랄리아스〉가 그런 책이야. 그러나 〈에코랄리아스〉처럼 잡다하게 나열된 지식들에 맥락이 부여되지 않고 입체성이 부족하면, 백과사전을 훑어본 느낌이 들어서 뭔가 좀 허전해. 앎이 기쁨으로 이어지려면, 넓이만이 아니라 깊이도 필요하거든. 그렇지만 그 둘 다에 이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에코랄리아스〉의 저자는 뛰어난 연구자이자 비평가일지 몰라도, 그 책 자체는 박이부정(博而不精)의 예를 보여주고 있어. 그런 책은 고전이 되기 힘들어. 고전이 되려면 지식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원근법이 필요해. 그런 고전 가운데 하나가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책이야.

이 책의 독일어판 원서가 몇 권으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한국어판은 창작과비평사, 아니 지금은 창비사라고 불러야겠지, 창비사에서 네 권으로 번역돼 나왔어. 이 한국어판은 개정판이 나오면서 역자들의 변동이 있었는데, 그냥 백낙청·염무웅 두 분 이름만 적을게. 염무웅 선생이야 독문학자시니 이 책의 번역자로 어색하지 않지만, 영문학자인 백낙청 선생도 끼였어. 사실 이 책의 번역을 기획하고 주도한 이는 백낙청 선생으로 알고 있어. 백 선생은 흔히 영문학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독일지성사에도 친숙한 분이지. 얼핏 듣기로는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영문학과 독문학을 복수 전공하셨다고 해. 게다가 시기적으로는 가장 뒤이지만 한국어판으로는 맨 먼저 나온 ‘현대편’의 해설에서 백 선생은 번역대본으로 독일어판을 주로 쓰면서 영역본과 일역본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어. 청년 백낙청은 이 책을 번역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지.

ⓒ이지영 그림

어떤 한 분야 예술의 통사를 쓰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야. 한국문학사를 전공하는 젊은이들의 필독서라 할 조동일 선생의 〈한국문학통사〉는 그 자체로 저자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문학을 비롯해서 조형예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까지를 망라해 통사를 쓴다는 야심을 하우저는 어떻게 품었을까? 영화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이 책의 내용 가운데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부분이 마지막 장 ‘영화의 시대’야. 계간지 〈창작과 비평〉 1966년 가을호에서지),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를 가로지르며 선사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역사를 쓰겠다는 기획 자체가 평범한 연구자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 더구나 한 나라의 예술이 아니라 유럽 예술 전체를 대상으로 말이지(〈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제목 앞에 유럽이나 서양이라는 말이 붙지 않은 것은 하우저의 유럽중심주의를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 고대편에서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예술이 조금 다뤄지고 영화를 기술하는 데서 미국 얘기가 조금 나오지만, 이 책은 유럽 이야기일 뿐, 전 세계 얘기는 아니야). 그러나 비범한 연구자인 하우저는 그 일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뤄냈어. 책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회사’라는 틀로 예술의 진화와 흥망성쇠를 그려내고 있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문학과 예술도 사회적 진공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하우저의 확고한 믿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책은 문학사이자 예술사이면서 동시에 사회사이기도 해. 그래서 혁명이나 반동 같은 당대의 급격한 사회변동이나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예술 향수자들의 확산 같은 데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것을 예술 작품들(에 대한 평가)과 연결시키지. 저널리즘과 문학의 관계를 따져보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아르놀트 하우저 지음백낙청·염무웅·반성완 옮김창비 펴냄

독일어 원서야 시간 순으로 나왔겠지만, 한국어판은 앞에서 말했듯, ‘현대편’이 제일 먼저 나왔고, ‘고대·중세편’ ‘근세편 상’ ‘근세편 하’가 그 뒤를 이었어. 근세편 두 권은 르네상스부터 19세기 중반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근세라 불리는 이 500년 가까운 시절이 인류 예술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와 무관하게 그 시절이 어떤 알 수 없는 계기로 하우저의 눈길을 가장 세심히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매너리즘’과 ‘부르주아’를 다시 보다

나도 처음에는 이 책을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순서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어. 네 권으로 완간된 게 1981년인데, 그 뒤 이번에는 시대순으로 다시 읽어봤어.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책 네 권을 다시 펼쳐보니 내가 밑줄 친 본문조차, 그리고 악필로 갈겨놓은 메모조차 처음 보는 듯 낯설더군. 그런 한편 내가 이 책을 읽을 때의 벅찬 감정은 거의 고스란히 되살아났어. 나는 이 책에서 트레첸토, 콰트로첸토, 친퀘첸토라는 이탈리아어 단어를 처음 접했고, 매너리즘의 예술사적 의미를 알게 됐고, ‘부르주아’라는 말의 새로운 이미지를 얻었어. 그때까지 몰랐던 많은 예술가들의 이름도 알게 됐지.

그러나 2000년이 넘은 세월 동안 인류가 축적한 예술의 역사를 사회적 관점에서 만족스럽게 기술한다는 것이 책 네 권으로 가능할까? 아마 거의 불가능할 거야. 그런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가능하게 만든 탓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가독성이 아주 높지는 않아. 적은 텍스트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면 문장들이 바짝 조여들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의 문장들이 바로 그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난삽한 철학과는 전혀 무관한 책인데도, 술술 읽히지 않아. 번역자들을 탓하는 게 결코 아니야. 이 책의 번역자들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니까.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한국어 문장인데도 술술 읽히지 않고 뻑뻑한 이유 하나는 이 책의 저자가 예술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 사실 예술사의 문외한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읽은 문장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는 일이 잦을 거야. 바로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문장들 자체가 긴장돼 있고, 한 문장과 그 다음 문장 사이에는 미리 습득된 역사적 교양으로만 메울 수 있는 공백도 보여. 그렇다는 것은 예술사의 문외한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 허영심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해.

또 한정된 지면에 그 장구한 시간을 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략한 기술들이 여러 군데서 보여. 나는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더러 이 책을 참고서로 사용하곤 했는데, 만족스러운 적이 거의 없었어. 예컨대 바로크 예술에 대해서나 매너리즘에 대해서, 또는 르네상스 시기의 천재 개념에 대해서 좀 긴 기사를 쓰려고 이 책을 훑어보면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어. 그것들에 대한 기술이 너무 소략했기 때문이야. 이 책이 문학과 예술의 백과사전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지.

아무튼 이 책은 유럽 문학과 예술사의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이야. 내 경험에 비춰보면, 꼭 시대 순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해. 외려 ‘1830년 세대’가 첫 장인 ‘현대편’부터 읽는 게 덜 낯설 것 같아. 지지난주 총선 결과에 만족한 사람, 불만인 사람, 절망적이 된 사람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해. 독서는 상한 마음을 달래주고, 경박한 기쁨을 줄여주니까.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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