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잠자리에서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이 글이 이 난의 마지막 글이네. 그래서 오늘은 그야말로 독서에 대한 극히 사적인 한담을 늘어놓을까 해. 언젠가 얘기했듯이, 나는 〈시사IN〉에 독서일기를 연재해온 장정일 작가나 몇몇 알려진 서평가들처럼 탐욕적인 독서가가 아니야. 그저 내 또래의 평균적 독서가라고 할 수 있지. 어쩌면 평균은 좀 더 될 수도 있어. 그건 내 지적 갈증 덕분이라기보다는 내가 신문기자로서, 더 나아가 글쟁이로서 살아온 덕분일 거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덜 읽는 사람보다 꼭 더 지적이거나 현명한 건 아니야. 그러나 책은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있는... 미래학 서적을 읽는 법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21세기도 시나브로 16년째야. 그 16년 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내가 지녔던 피처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고, 그와 함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매우 활발하게 되었어. 그래서 지하철에서 종이신문이나 책을 보는 사람은 거의 사라지고 IT 기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늘어났어. 국제 정세를 보면 중국이 전문가들의 예측보다 훨씬 일찍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서방국가들과 나머지 나라들 사이에 냉전이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중동 지역에서만 목격되던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가 전 세계로 번지고 있어.과거를 되돌아보는 낯선 과학책으로 이끄는 훌륭한 길잡이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어려서 읽은 어린이 문고들을 빼면, 내가 처음 읽은 과학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던 것 같아. 지적 허영심으로 끝까지 읽어냈지만, 아주 지루한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 번역도 형편없었던 것 같아. 20대에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다윈의 지적 자식들이 쓴 책들을 나중에 내가 얼마나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그 지겨웠던 〈종의 기원〉을 다시, 그때와 달리 감동적으로 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종의 기원〉 다음에 읽은 과학책은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야. 이 책은 제목을 그냥 〈프린키피아〉(‘원리’라는 뜻 낯설지만 아름다운 순우리말 4793개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사전도 책은 책이지만 사전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특히 어휘 사전을 읽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거야. 어휘 사전은 읽는 책이 아니라 찾아보는 책이지. 사실 요즘은 어휘 사전이 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서 종이책 사전을 찾아보는 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나는 10대 후반 한 시절 국어사전을 읽은 적이 있어. 그냥 읽은 게 아니라 고유어를 중심으로 밑줄 쳐가며 그 낱말을 익히려고 애썼어. 말하자면 그냥 헐렁한 독서를 한 게 아니라 열심히 공부를 한 셈이지. 그 시절 나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영향을 짙게 받은 50년 망국사를 쓰고 자결한 남자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어쩌면 들어봤을지 모르고 못 들어봤을지도 모를 한시(漢詩) 네 수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할게. 좀 지루할지 모르겠는데, 망국의 설움을 추체험하게 하는 시들이야. 원문은 나도 이해할 수 없으니, 국문으로 번역된 걸 인용할게.“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두의 나이에 이르도록/ 목숨 버리려다 그만둔 것이 몇 번이던고,/ 오늘에야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람 앞의 촛불 번쩍번쩍 창천에 비추누나.”“요기가 하늘을 가려 제성(帝星)이 옮기니/ 대궐은 침침한데 시각이 더디구나./ 조칙은 이제부터 다시 내리지 않으리니/ 임랑의 종이 ‘수포자’에게 추천하는 수학 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수포자’라는 말 들어보셨는지? ‘수학 포기자’의 준말. 내가 수포자가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아. 어쩌면 중학교 2학년 때일지도 몰라. 2차함수를 배우면서 ‘아, 이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싶더라고. 그렇다고 단번에 수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 수학은 워낙 중요한 과목이니까.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 학문인지를 알았다는 게 아니라, 상급학교 진학에 수학 성적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알았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수포자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애는 써봤어. 그러나 소용없었어. 수학은 내게 매정했어. 고등학교 때 수 고전이란 어떤 책들일까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고전을 읽으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들어. 그런데 여기서 고전이란 어떤 책들일까? 얼른 떠오르는 게 서양의 경우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고 동양의 경우엔 공자와 맹자의 저서들이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맹자는 확실히 지적으로 비범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이들의 ‘앎’이 평균적 현대인의 ‘앎’보다 넓거나 깊을까? 그럴 수는 없어. 이들은 우리보다 2000~3000년 전 사람이고, 그 2000~3000년간 우리 인류는 많은 ‘앎’을 축적해왔으니까. 화이트헤드라는 영국 철학자는 서양철학사를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영국 문학’이 된 [채식주의자]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너무 호들갑 떨면 작가 자신도 민망할 테지만, 얼마 전 한국 문단에 경사가 하나 있었어. 짐작들 하시겠지만, 소설가 한강씨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국제 부문 수상자가 된 거 말이야. 어쩌면 한강씨의 수상으로 맨부커상이라는 걸 처음 들어본 이들도 있을지 몰라. 그냥 부커상이라고 하면 ‘아, 그 상, 이름은 들어봤지’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금융기업 맨그룹(Man Group)이 상금을 후원하면서 2002년에 맨부커상이라고 이름을 바꾼 부커상은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들 가운데 하나야. ‘문학상들 가운데 하나’라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두 권의 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를 비롯한 학습서를 빼놓으면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물론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되풀이해서 읽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버릇을 들이지 못했어. 문학작품이든 인문학·사회과학 서적이든 그것들이 아무리 공인된 고전이라 하더라도 되풀이해서 읽은 적은 많지 않아. 물론 글을 쓰다가 인용하기 위해 확인하려고 책의 한두 대목을 다시 펼쳐보는 일은 흔히 있지만.시집은 다르지. 고전이든 아니든,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나는 거듭 읽어. 그건 그 시집들에 묶인 시들을 다 외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유럽 예술을 원근법으로 보다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지난번 이 자리에서 〈에코랄리아스〉에 대해 얘기하며, 저자의 박학이 놀라웠다고 했지? 확실히 어떤 책들은 단순한 박학만으로도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에코랄리아스〉가 그런 책이야. 그러나 〈에코랄리아스〉처럼 잡다하게 나열된 지식들에 맥락이 부여되지 않고 입체성이 부족하면, 백과사전을 훑어본 느낌이 들어서 뭔가 좀 허전해. 앎이 기쁨으로 이어지려면, 넓이만이 아니라 깊이도 필요하거든. 그렇지만 그 둘 다에 이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에코랄리아스〉의 저자는 뛰어난 연구자이자 비평가일지 몰라도, 그 책 자체는 박이부정(博而不精 언어의 둘레를 살피는 풍경화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는 중요한 특징 하나는 언어의 사용이야. 여기서 언어는 좁은 의미의 언어야. 언어라는 말을 느슨하게 사용할 때, 개미의 군락(群落)이나 화학언어, 벌들의 날갯짓도 언어라고 할 수 있겠지. 또 이런저런 컴퓨터 언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언어는 개념과 청각 이미지가 결합된 기호들의 구조적 체계를 가리켜. 이런 언어를 자연언어라고 불러. 한국어, 일본어, 영어 같은 언어 말이야. 생각의 뭉치를 형태소로 나누고, 소리의 뭉치를 음소로 나눈 뒤 이들을 이리저리 배열하고 결합하고 대응 당신이 이 시집을 읽어야 하는 이유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내 한국어 감각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독서’라고 말할 때 그 읽는 대상으로 시집을 떠올리는 일은 드문 것 같아. 시집도 분명히 책인데 말이지. 그렇지만 어떤 자연언어의 가장 깊숙한 곳을 움켜쥐는 장르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포함한 산문이 아니라, 시야. 그래서 나는 시인들을 모국어의 속살에 다다른 사람이라고 여겨. 오늘은 최근에 읽은 시집 이야기를 하려고 해. 송경동이라는 시인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시집이야. 창비에서 나왔어.제목이 참 도발적이지?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니? 그 표제시의 마지 책이라는 거푸집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어떤 책은 독자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그런 책을 만난 사람이 못 만난 사람보다 더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예컨대, 올해 들어서야 독일에서 비판적 주석을 붙여 출간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나돌았지만, 그 책을 읽고 감명받아 파시스트가 된 사람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책만은 아니지. 스승, 부모를 비롯한 가족, 특이한 경험들, 그 밖에도 많겠지. 내 경우는 삶이 책이라는 거푸집을 통해 빚어진 것 같아. 책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 ‘문제적 인물’로 읽는 세계사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초등학생 때 읽는 책으로 가장 흔한 장르는 뭘까? 물론 교과서는 빼고 말이지. 내 경험으로는 위인전이야. 그게 반세기 전 얘기니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네. 영어나 한자 학습서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렇지만 요즘에도 초등학생들은 위인전을 많이 읽을 거라 짐작해. 선생님들이 위인전 읽기를 추천하기도 하실 거고.위인전은 말 그대로 훌륭한 사람의 전기야. 나도 초등학생 시절에 그런 훌륭한 사람들의 전기를 꽤 읽었어. 물론 누가 훌륭한 사람이냐를 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교육 당국이지. 내 경우에는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유럽 지성사를 꿰뚫게 해주는 세 권의 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격주로 연재되는 장정일 시인의 ‘독서일기’와 내 ‘독서한담’은 책에 대한 이야기야. 장정일 시인의 ‘독서일기’는 대체로 지식인들을 독자로 삼은 듯하고, 내 ‘독서한담’은 그야말로 재래시장의 대폿집에서 술친구들에게 늘어놓는 잡담에 가깝지만, 둘 다 책에 대한 이야기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전문적으로, 시간적·주제적 체계를 잡아서, 비평적 안목으로, 책이 나온 배경까지를 톺아가며 쓴다면 어떤 학문 장르가 될까? 지성사(학)(intellectual history)라는 분야가 될 거야. 더 헐렁하게 잡으면 지식사회학(sociology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하여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누구나 알다시피 ‘독서’는 책을 읽는다는 뜻이야. 그런데 책이란 뭘까? 지니고 있는 〈동아국어사전〉에서 ‘책’을 찾아보니 “1.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종이를 꿰맨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종이를 여러 장 겹쳐 맨 물건”이라고 풀이돼 있네. 두 번째 뜻의 책이 쓰인 예문으로는 “모조지를 책으로 매어 연습장을 만든다”를 들어놨어. 물론 이 뜻의 책은 ‘독서’라고 말할 때의 책은 아니지. 그런데 첫 번째 뜻의 책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책’이라는 말과 고스란히 포개지지는 않아. 예컨대 우리는 리플릿이나 대한민국은 영남공화국이다?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어떤 책이, 그 자체로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라, 사회 주류의 합의를 거슬렀기 때문에 공론의 장(場)에서 배척받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당연히 있어. 오늘은 그 슬프고 불온한 책에 대해 얘기하려고 해. 책 제목은 〈아주 낯선 상식〉이고, 김욱이라는 법학자가 써서 개마고원이라는 출판사에서 냈어. 이 책이 사회 주류의 합의를 거슬렀다고 할 때, 그 주류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한국 사회의 보수 우익 세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개혁을 표방하든 진보를 표방하든, 이 사회에서 주류가 될 수는 있어.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면서도 좋은 스펙과 두 개의 이름과 하나의 삶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작품을 그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무관한 독립적 텍스트로 대하는 것은 현대 비평의 큰 원칙이야.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작품과 작가가 완전히 단절돼 있을 수는 없지. “이것은 내 자전적 소설이다”라고 작가가 선언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작품에는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사실 모든 소설은 기억의 변형이 아닐까? 상상력이라는 것도 기억 위에서 구축되는 것 아닐까?최근에 로맹 가리의 〈내 삶의 의미〉라는 얄팍한 책을 읽었어. 내용이 얄팍하다는 게 아니라 책 두께가 얇다는 말이야.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 ‘한자 덕후’로 이끄는 한 권의 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소리를 그릴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소리를 그릴 수는 없겠지만, 사람의 말소리는 그릴 수 있어. 어떻게? 우리는 매일 소리를 그리고 있어. 그게 글자지. 그러니까 문자는 소리의 그림이야. 우리 행성에서 쓰는 자연언어는 수천에 이르지만, 문자는 그렇게 많지 않아. 고대에나 중세에 쓰이다 사라진 문자들(예컨대 게르만족이 예전에 쓰던 룬문자나 만주어를 표기하던 만주문자)까지 포함하면 몇십 종에 이를지 모르겠지만, 지금 사용되는 문자는 아무리 늘려 잡아도 스물을 넘지 못할 거야.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는 잘 알다시피 로마문자지. 그런데 손석희를 능가한 '100분 토론' 진행자, 그 이름 정운영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마르크스는 선배들의 사회주의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인 뒤 제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어. 그러니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다른 이름이야.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일까?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시절, 운동권의 많은 활동가와 이론가들은 그것을 과학이라 여기고 마르크스와 그 동료·후배들의 책을 읽어댔어. 그런데 나는 과학은 오로지 자연과학을 뜻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흔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대립시켜. 일부 프랑스 학자들은 인문‘과학’이라는 말도 써. 이것은 19세기 철학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