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국어 감각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독서’라고 말할 때 그 읽는 대상으로 시집을 떠올리는 일은 드문 것 같아. 시집도 분명히 책인데 말이지. 그렇지만 어떤 자연언어의 가장 깊숙한 곳을 움켜쥐는 장르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포함한 산문이 아니라, 시야. 그래서 나는 시인들을 모국어의 속살에 다다른 사람이라고 여겨. 오늘은 최근에 읽은 시집 이야기를 하려고 해. 송경동이라는 시인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시집이야. 창비에서 나왔어.

제목이 참 도발적이지?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니? 그 표제시의 마지막 연을 옮겨볼게. “나는 한국인이다/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송경동이다/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파르빈 악타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투쟁이며 항쟁이다.”

이 연에서 언급되는 ‘피룬’ ‘파비’ ‘파르빈 악타르’ 등은 동남아시아의 한국계 기업에서 착취에 맞서 투쟁하다 고혼이 된 젊은 노동자들의 이름이야. 그러니까 이 시는 자본에 맞선 노동의 투쟁은 결국 ‘국제주의’가 돼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어. 그래서 화자는 자신이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거지. 사실 노동운동이 국제주의에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은 마르크스 이래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견결히 지니고 있던 믿음이야.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온전히 실현된 적은 없는 믿음이지. 아무런 대의도 찾을 수 없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유럽 나라들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를 위해 총알받이가 될 노동자의 처지를 깨닫고 반전운동에 들어가. 그렇지만 이내 그 반전운동은 시들어버리고 그 자리를 애국주의가 차지하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독일사회민주당은, 극소수의 원칙주의자들을 빼고는, 빌헬름 2세의 전쟁에 협력하게 돼.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라는 구실로 말이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들이 자랑스레 내세우던 ‘인터내셔널리즘’에서 ‘인터’를 지워버리는 데는 몇 달도 걸리지 않았어. 사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해. 자본에는 국적이 없지만, 자본가에게는 국적이 있고 노동에는 국적이 없지만 노동자에게는 국적이 있거든. 여기서 ‘국적’이라는 건 여권에 표시된 나라의 이름이라기보다, 어떤 자본가나 어떤 노동자가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공간이야. 그리고 그 공간이 꼭 나라만은 아니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그래서 송경동은 앞서 인용한 표제시에서 이렇게 자문하기도 해. “정규직 자녀 우선 채용에 합의하는/ ‘대공장 민주노조’를 위해/ 비정규직 확산과 우선해고에 눈감는/ ‘대공장 민주노조’를 위해/ 이젠 해외여행깨나 다니는/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 고용안정을 위해/ 한국 사회 중산층의 다수를 이루는/ ‘민주노총 정규직 조합원’들을 위해 힘써 살아온/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자본가들이나 보수 언론이 ‘노동귀족’(사실 이 말의 부정적 뉘앙스는 놀랍게도 엥겔스에게서 비롯돼!)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위해 싸워온, 그러나 자신은 노동귀족이 아닌 ‘분열적’ 자아에 반성적 현미경을 들이대보는 거지. 그리하여 시인이 다다른 결론은 노동운동의 고색창연한 진리인 국제주의야. 그 국제주의는 국경을 넘어서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의 여러 계층적 경계를 뛰어넘는 사회·경제·지리학적 국제주의지. 이 급진적 국제주의는 “그리스에서 노점을 하던/ 열다섯 살 알렉산드로스가/ 경찰이 쏜 탄환에 맞아 숨졌다/ 붉은 꽃이 그리스 전역에서 피어올랐다”에서 시작해 “목과 다리를 다친 채로/ 한국의 감옥에 갇혀 있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독방이지만/ 왠지 혼자만 사는 것 같지 않다”로 마무리되는 ‘1%에 맞선 99%들’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낳은 파멸적 연쇄반응을 그린 ‘나비효과’, 서방국가들의 경제적·군사적 제국주의를 적나라하게 그린 ‘스모키 마운틴’에서도 또렷이 드러나.

그렇다고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시집이 ‘메아리 없는’ 국제주의에만 바쳐진 것은 아니야. 이 시에는 차광호라는 이에서부터 시작해 이창근, 김진숙, 박점규, 김태환, 하중근, 전용철, 홍덕표, 문기주, 한상균, 복기성, 최병승, 홍종인, 정홍근, 김재주, 김소연, 인봉이 형, 경규 형, 보열이 형, 최강서, 송국현, 박창수, 김경숙, 진기승을 거쳐, 아 그 열다섯 어린 나이에 죽은 문송면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 이름을 알거나 모르는, 지금 살아 있거나 작고한 수많은 한국인 실명(實名)이 등장해. 그들은 대부분 노동자고 일부는 농민이며, 자본이 밀어주는 정치권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투옥된 사람들이야. 송경동은 자신의 시들에 이 이름들을 배치하며 한국 노동운동의, 또는 한국 노동운동 탄압사의 맥락을 깊은 자의식 위에 포개고 있어.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송경동 지음창비 펴냄

‘국보’라는 시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김소연이/ 투쟁하는 노동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돕지도 못하고/ 어느 깊은 산속에서 쉬고 있었다”로 시작하는데, 그 선거에서 그녀를 찍지 않고 ‘오직 박근혜의 당선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녀린 희망으로’ 문재인 후보를 찍은 3년 전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떠오르더군. 이 시 제목 ‘국보’는 ‘국가보안법’을 줄인 말이고, 이 시에는 젊은 시절 내내 국보로만 감옥살이해온 문재훈이라는 사람이 등장해. 그는 이 시의 화자에게 “당신은 당신 앞의 밤만 캄캄하지/ 우리는 정치사상적으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당신은 그게 문제라고”라며 화자에게 훈계하지. 화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치사상적으로 앞뒤가 꽉 막힌’ 그에게 긍정의 맞장구를 쳐주지만, 거기엔 비수 같은 경멸이 웅크리고 있어. 송경동 시는 이따금 지식인 티를 내는 ‘운동가’를 등장시켜서 그를 비웃는데, 그 비웃는 언어는 묘하게도 지식인의 언어야. 이건 찬사도 힐난도 아닌 그냥 내 관찰 보고야.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포함해 송경동의 시들은 굳이 ‘노동시’라는 세부 장르명이 조금도 필요 없을 만큼, 문학적으로 단단해.

돌이켜보면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는 노동시, 또는 넓게는 민중시가 하나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역사의 벽장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1980년대 말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이런 정치시들이 제 나름의 힘을 발휘했지. 그 흐름은 박노해나 박영근·백무산 같은 뛰어난 시인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이제 노동해방이라는 염원을 간절히 담은 시집은 거의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띄엄띄엄 나온다 하더라도 송경동 같은 시적 성취에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시사IN〉 독자들이 송경동의 이 시집만이 아니라 이전 시집들도 찾아 읽기 바라.

사실 송경동의 시만이 아니라 노동시라고 불리는 시들은 거의 다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는 학습된 비관주의자인 터라, 이런 노동시들이 그리는 미래는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전 세계 부자 85명이/ 세계 인구 절반과 동일한 부를 소유한 이 지구별”(‘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의 상황이 극적으로 개선되리라는 희망이 내게는 없어. 그것은 인류라는 종에 대한 내 불신과도 관련이 있을 거야. 그러나 진리라는 게 붙박여 존재하지 않고 그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진리라면, 인간해방이라는 것도 붙박여 존재하지 않고 그 해방을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해방일 거야. 송경동의 시들은 그 인간해방을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이야. 이 정도면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를 읽을 이유로 충분치 않을까?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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