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샌더스, “부의 독점은 비도덕적이고 그릇된 일”


샌더스와 코빈의 인기비결, MMT란 무엇인가?

 

제레미 코빈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법

 

 

지난 9월 영국 노동당 대회에서 ‘좌파’ 제러미 코빈이 대표로 당선된 것은 최근 유럽 정치의 ‘좌향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올해 초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 연합 시리자의 집권이나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포데모스’의 약진, 포르투갈 총선(10월2일) 이후 좌파 연정의 성립 등 유럽 정치 풍향계는 명백히 왼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진행된 유럽 각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우경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기존 좌파 노선에서 이탈해서, 자국 경제구조를 국내외 금융자본에 유리하게 재편하고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해왔다. 일자리를 늘린다며 고용 환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복지를 축소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이런 사민주의 정당들의 우경화를 주도한 정당이 바로 영국 노동당이었다. 지난 5월 영국 노동당은 총선 패배를 진단하고 평가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정당 이미지의 급진성’에 대한 질문에서,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더 급진적’이라는 답변이 무려 23%에 달했던 것이다. ‘노동당이 급진적’이라는 응답자는 19%에 불과했다. 이미 영국 노동당 주류는 유권자들에게 기득권 세력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당 내부의 이단자인 코빈이 당 대표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코빈이 영국 경제의 침체와 불평등을 치유하기 위해 내건 슬로건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반(反)긴축’이다. 정부 지출을 늘려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설사 정부의 지출이 수입(세입)보다 더 많아, 보수당이나 노동당 우파들이 기겁하는 재정적자(예산적자) 상태가 도래한다 해도 이를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AP Photo영국 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사진)는 정부 지출을 늘려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유럽의 보수 세력이나 사회민주당 우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 준칙은 ‘예산 균형’이었다.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한도(수입) 내에서만 지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민간 부문의 경제활동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최상위 부유층과 기업에 대한 세금은 오히려 내렸다. 영국의 법인세(기업에 대한 소득세)는 20%로 G7 가운데 최하위다. 이로 인해 정부 수입이 줄어든 만큼, 예산균형 원칙에 따라 복지 등 정부 지출을 축소하면서 빈곤층의 경제적 고통은 더욱 악화되었다. 코빈은 이 같은 예산균형 준칙에 맞서고자 한다. 긴축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지출을 늘려서, 즉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것으로 영국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복지를 확충해서 민간 수요를 늘리는 것이다. 이렇게 늘어난 수요에 따라 공급자(기업)들이 생산을 확대하면, 일자리와 국민소득도 증가할 것이다. 둘째는, 사회 인프라(예컨대 교통·정보통신·테크놀로지 등)에 투자해서 국내 기업들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다(이 과정에서 고용도 촉진된다). 이른바 ‘공공투자’다. 그런데 코빈이 발표한 ‘2020년 집권 플랜’을 간단히 요약하면, ‘공공투자 확대를 통한 경제성장’이다. 첫 번째 방법(민간 수요 증대)보다 두 번째인 공공투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 위한 양적완화=계획적 양적완화

한국에서도 ‘소득주도 성장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사실 복지 확충을 통해 소비만 늘린다면, 그 경기부양 효과는 오래가기 힘들다. 그러나 사회 인프라를 건설·강화한다면, 코빈 노동당의 경제정책 자문위원회 앤 페티포 위원장의 주장처럼 “정부 주도의 공공투자로 국가경제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장기 성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영국 경제의 체질이 개선되면, 기업 수익성의 향상과 일자리 창출에 따라 세입(정부 수입) 역시 늘어날 것이다. 재정적자 규모가 줄어들거나 균형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대규모 공공투자를 수행할 기구로 코빈은 국립투자은행(National Investment Bank) 설립을 제안한다. 개발도상국 시절, 한국의 산업은행처럼 국가경제에 요긴한 부문에 자금을 몰아주는 ‘국영 금융기관’이다. 코빈에 따르면 국립투자은행은 주택·교통, 디지털 및 에너지 네트워크(공급구조) 구축 등에 대한 전략적 투자와 더불어 철도·전기·가스를 비롯한 민영화된 사회 인프라 부문을 재국유화하는 구실을 맡게 된다.

그런데 국립투자은행이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해내려면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 여기서 코빈은 재미있는 용어를 만들어낸다. 이른바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People’s Quantitative Easing)’로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양적완화’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중앙은행이 ‘돈’을 대폭 찍어내(통화 증발) 민간 부문에 유통시키는 경기부양 정책이다. 2008년 이후 미국·일본·EU 등의 중앙은행은 ‘새로 찍어낸 돈’으로 민간 금융기관들이 보유한 국채 등을 사들였다. 이런 거래가 끝나면 중앙은행은 국채(민간 금융기관들이 보유했던)를, 민간 금융기관들은 ‘새로 발행된 돈’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민간 부문의 자금이 늘어난다. 이 같은 양적완화의 원래 취지는 금융기관들이 늘어난 자금을 실물경제에 싸게 대출해서 실물경기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EU 등의 금융기관들은 실물경제가 아니라 주로 국내 주식시장이나 해외 이머징마켓의 금융시장에 투자해서 자산 버블만 유발시켰다.

ⓒAFP캐머런 영국 총리(위)에게 ‘노동당의 이단아’ 코빈은 만만치 않은 적수다.

이에 비해 코빈의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는 늘어난 통화를 자산시장이 아니라 실물경제 부문에 투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EU 등의 중앙은행은 다수의 민간 금융기관들로부터 국채를 매입했다. 그러나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에서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은 ‘새로 찍어낸 돈’으로 국립투자은행이 발행한 채권만 매입한다. 국립투자은행은 이렇게 조달한 재원으로 각종 사회 인프라에 투자한다. 새로 발행된 화폐가 사회 인프라 부문의 기업과 노동자, 즉 실물경제 부문에 ‘배포’되는 것이다. 미국·EU 등의 양적완화와 비교한다면, 코빈의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는 늘어난 돈이 주로 실물경제 부문에서 사용되도록 의도된 ‘계획적 양적완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공투자’와 ‘계획적 양적완화’를 양대 축으로 하는 코빈의 경제 구상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비판의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양적완화는 통화를 크게 늘리는 것인 만큼, 자칫 물가를 치솟게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통화가 2배 늘어났는데 생산 규모(GDP)가 그대로일 경우 물가는 2배로 오를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을 동반하는 정책이다. 전 영란은행 소속 연구자였던 토니 예이츠는 코빈의 정책이 “화폐의 사회적 유용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영국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아무리 ‘민중을 위한다’고 해도 양적완화는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중앙은행 독립성 논란 거세질 듯

코빈 진영의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인플레이션 우려가 크게 과장되었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박한다. 만약 지금이 ‘정상적 시기’라면 기업과 가계는 앞다퉈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투자·소비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금리가 인상되고, 수요 폭증에 따라 물가 역시 크게 오를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장기 침체가 예상되는 ‘예외적 국면’이다. 기준금리는 사실상 0%이고 물가인상률도 바닥을 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투자은행이 ‘새로 발행된 돈’을 인프라에 투자한다면, 그 돈은 인프라 기업의 소유가 된다. 인프라 기업들이 사업 의욕에 넘쳐서 그 돈을 새로운 투자에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물가가 오를 것이다. 이는 사실 바람직한 일이고, 정부는 그 시점에 가서 신중하게 통화를 거둬들이면 된다(세율 인상이나 채권 매각 등으로).

그러나 경기침체가 계속된다면, 인프라 기업은 국립투자은행으로부터 받은 돈 가운데 대부분을 주거래은행에 맡겨두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시중은행들의 보유금이 늘어난다. 시중은행들이 보유금을 관리하는 방법은 민간 시장(다른 은행 포함)에서 운용하거나 중앙은행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금리 수준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중앙은행에 맡겨놓고 작은 이자나마 안정적으로 타는 것이 낫다. 이렇게 되면 영란은행이 양적완화로 ‘새롭게 발행한 돈’은, 국립투자은행과 민간 인프라 기업, 그리고 시중은행을 통해서 다시 영란은행 계정으로 들어오게 된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과도한 물가인상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 다만,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가 실제로 물가가 크게 오르는 상황에는 대비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비판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중앙은행은 정치 부문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해서 통화 조정을 통한 물가관리만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을 해친다는 것이다. 코빈의 계획대로라면 영란은행은 정부(직접적으로는 국립투자은행)의 요구에 따라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 이는 중앙은행이 정부의 산하기관으로 전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과연 하늘에서 내려준 보편적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컨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기관이지만, 사실은 국회로부터 물가 관리뿐 아니라 완전고용까지 위임받아 통화정책을 수행한다. 심지어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의 최근 발언을 보면 ‘연준이 물가보다 완전고용을 위해 통화정책을 운영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부가 주요 경제정책에 중앙은행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중앙은행이 정부의 사금고화되었다’는 비판은 지나치게 과장된 느낌이 있다.

코빈 대표가 이끄는 노동당 예비 내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를 반드시 수행해내야 한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그러했듯이, 당내 반대자들을 넘어서기 위해 영국 유권자들, 청년 세대들, 노동조합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노동당이 집권하게 될 경우 경제를 잘 운용함으로써 반긴축-재정적자 노선이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임을 증명해야 한다. 둘 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기자명 남종석 (부산대 경제학과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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